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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형평사

제목 조선 형평사
한자명 朝鮮衡平社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23년부터 1935년까지 백정(白丁)의 사회적 신분 해방을 목적으로 활동한 전국적 운동 단체.

[내용]

조선 시대 백정은 도살업이나 육류 판매업 등을 주로 하며 생활하던 천민 계층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들은 거주가 제한되었으며 별도로 관리되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해체되었지만, 최하층의 신분으로 여겨지던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제 역시 신분제적 요소를 완전히 없애지 않고 호적 대장 등 관공서의 문서에 백정 신분임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차별에 대항하기 위한 백정들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특히 1923년 경상남도 진주(晋州)에서 백정 출신의 자산가 이학찬(李學贊)의 자식이 학교에 입학하려고 하였으나, 공사립학교에서 아이의 입학을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항의하는 과정에서 백정의 사회적 신분 해방에 대한 공감대가 광범하게 형성되었고 그를 위한 운동 단체로서 조선 형평사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학찬을 비롯하여 백정 출신 지식인인 장지필(張志弼)과 당시 조선일보 진주 지사장으로 있던 신현수(申鉉壽), 강상호(姜相鎬) 등의 주도로,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 창립대회가 열렸다. 조선 형평사는 창립 취지문에서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다. 고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여, 교육을 장려하고 우리도 참다운 인간으로 되고자 함은 본사의 주지이다.”라고 조직 배경에 대해서 밝혔다.

사회적 평등을 외쳤던 조선 형평사는 창립 1년 만에 전국에 본사 1개, 지사 12개, 분사 67개 등이 조직되며 전국적인 단체로 성장하였다. 이렇게 조선 형평사가 급격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차별 철폐에 대한 백정들의 요구와 더불어 각계 사회 운동 단체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립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집행위원은 강상호, 신현수, 이학찬, 장지필, 천석구(千錫九)로, 이 가운데 백정은 이학찬과 장지필 뿐이었다. 조선 형평사의 사칙에는 백정이 아닌 자도 사원이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서, 사회 운동 단체와의 긴밀한 결합이 가능하였다. 창립대회에 진주노동공제회와 진주청년회가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일본의 북성회에서 축전을 보내는 등 사회 운동 단체들의 높은 관심과 지원 속에서 조선 형평사가 탄생하였다.

조선 형평사와 사회 운동 단체와의 관계는 각종 반(反)형평사 사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반형평사 사건으로는 1925년 예천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경상북도 예천(醴泉)의 형평사 분사가 반형평사 운동으로 습격을 받자,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조선청년총동맹 등 사회 운동 단체가 개입하여 형평 운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들이 형평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사회 운동 단체와의 긴밀한 연관 때문에 사회 운동의 변화가 조선 형평사에도 동일하게 반영되었다. 사상 단체 정우회를 중심으로 사회 운동에서 ‘방향 전환’이 제기되자, 조선 형평사 내부에서도 1927년부터 계급 운동으로의 노선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선 전환에 대한 요구는 지방대회로부터 시작되었으며, 1928년 4월 25~26일에 걸쳐 열린 조선 형평사 제6회 전국대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제6회 전국대회 결과 조선 형평사는 신강령을 채택하였다. 신강령에는 다른 사회 운동과의 연대 활동 및 계급 의식을 강조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조선 형평사의 조직 형태를 지사나 분사의 연맹체가 아닌 중앙집권제로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 형평사가 민족 운동 및 사회주의 세력과 결합하여 활발히 활동하자 일제는 조선 형평사에 대해 탄압을 가했다. 1927년 1월에는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서광훈(徐光勳), 오성환(吳成煥), 장지필 등 조선 형평사 간부들이 체포되었다. 1932년 12월 25일 광주의 형평사원 정석홍의 검거를 시작으로 약 7개월 동안 100여 명의 형평사원이 검거되는 형평청년 전위동맹 사건(衡平靑年前衛同盟事件)이 일어났다. 일본 경찰의 발표에 의하면, 1931년 2월에 발생한 광주 지역 수육 판매 조합 설립 관련 분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형평사 내의 비밀 결사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지만, 조작 사건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 사건으로 지도부가 와해되었고, 조선 형평사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온건한 지도부가 성립하였다.

1935년 4월 24일 조선 형평사의 13차 전국대회에서 조직 명칭을 대동사(大同社)로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대동사는 “정의의 기치 아래에서 협력하여 국민정신을 발휘한다.”는 내용을 강령에 포함하였다. 적극적인 사회 운동과 궤를 달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대동사는 이후 단순한 이익 단체가 되었으며, 결국에는 일제에 협력하는 단체로 점차 변화해 갔다.

▶ 관련자료

ㆍ조선 형평사(朝鮮衡平社)
ㆍ형평사(衡平社)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