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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제목 을묘왜변
한자명 乙卯倭變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일본
유의어 달량왜변(達梁倭變), 을묘왜란(乙卯倭亂)
별칭•이칭

[정의]

1555년(명종 10) 왜구가 전라남도 이진포(梨津浦)와 달량포(達梁浦)를 침입해서 주변 해안지역을 약탈했던 사건.

[내용]

조선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과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부터 부산포(釜山浦)⋅내이포(乃而浦)⋅염포(鹽浦)의 3포를 개항해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했다. 개항장에는 왜관(倭館)을 설치해 교역과 접대의 장소로 활용했다. 그런데 왜관을 중심으로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증가하였고, 이들은 조선의 통제에서 벗어나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대표적 사건이 1510년(중종 5) 부산포와 제포(薺浦)에서 발생했던 3포 왜란(三浦倭亂)이었다. 양국의 관계는 1512년(중종 7) 임신조약(壬申條約)을 통해 회복되었으나 이후에도 왜변은 계속 발생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544년(중종 39) 사량진 왜변(蛇梁鎭倭變)과 을묘왜변이었다.

을묘왜변은 1555년(명종 10) 5월에 일본 선박 70여 척이 달량포 밖에서 정박하고 있다가 갑자기 상륙해 백성들을 약탈하고 성을 공격하는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은 혼란기를 겪으면서 여러 세력들이 주변 지역에 대한 약탈 활동을 재개했다. 이들은 후기왜구로 불리기도 하는데 명의 연안 지역은 물론 조선의 연안 지역도 약탈했다. 왜구들의 침입 중 규모가 가장 컸던 것이 바로 을묘왜변이었다. 당시 왜구들은 달량성을 함락시키고 계속해서 어란도(於蘭島)⋅장흥(長興)⋅영암(霊岩)⋅강진(康津) 등 일대를 약탈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 도순찰사(全羅道 都巡察使), 김경석(金景錫)을 우도방어사(右道防禦使), 남치훈(南致勳)을 좌도방어사(左道防禦使)로 임명해 왜구를 방어하도록 조치했다. 결국 조선군은 영암에서 왜구를 격파하면서 왜변은 마무리되었다.

조선은 을묘왜변 이후 비변사를 설치해 국방 문제를 논의했다. 아울러 일본인들에 대한 접대 비용을 축소하는 동시에 기술자를 제외한 왜인 포로를 모두 처형하여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明宗實錄』 권 25, 명종 16년 6월 갑자 및 권 29, 명종 18년 8월 갑인) 을묘왜변부터 임진왜란까지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교역과 왜구가 동시에 문제가 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 관련자료

ㆍ을묘왜변(乙卯倭變)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