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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조 요구

제목 21개조 요구
한자명 二十一個條要求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중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 일본이 중국에 대한 이권을 일방적으로 차지하기 위해 중화민국 정부에게 제출한 불평등한 요구 사항.

[내용]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참전한 일본은 중국 산둥 반도(山東半島)의 독일 조차지를 점령했다. 그 뒤 일본인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외무대신이 주도하여 1915년 1월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 중화민국 총통에게 5호 21개조로 된 요구 사항을 제출했다.

주요 내용은 산둥 이권의 획득(제1호), 1923년 중국에 반환될 예정이었던 남만주의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의 조차 기간을 99년으로 연장하고,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의 철도 이권을 연장하는 등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조약을 통해 확실히 할 것(제2호), 일본 자본이 유입되어 있던 한예핑매철공사(漢冶萍煤鐵公司)를 중일 합작으로 하고, 다예철산(大冶鐵山)의 채굴권을 보전하고 철광석을 일본의 야하타제철소에 공급할 것(제3호), 중국 연안의 항만 및 섬의 타국에 대한 할양⋅대여 금지(제4호), 희망 조건 형식으로 일본인 고문을 중국 정부에 들일 것(제5호) 등이었다.

이런 일본의 무리한 요구는 국제 문제로 파급되었고, 중국 내에서도 불평등한 침략적 요구에 반발하는 반일⋅배일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2월부터 진행된 조약 교섭에서 중국은 교섭 경과를 언론과 서구 열강에 전하면서 일본에 대항했다. 미국과 영국도 일본의 독단적 요구에 반대하였는데, 특히 제5호 항목에 크게 반발했다. 정세를 살피던 일본 정부는 5월 4일 교섭이 결렬되자, 5월 7일 제5호를 제외한 다른 조항을 수락하지 않을 때 군사 행동에 돌입할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하였다. 당시 중국 정부는 일본군에 맞설 만한 무력이 없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라 서구 열강으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어려웠다. 이 상황에서 5월 9일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조약 조인은 5월 25일)

일본의 산둥 반도 점령과 21개조 요구는 중국의 지식인과 해외의 화교, 중국인 유학생들을 크게 자극했다. 이들은 중국 정부에 대해 연약 외교, 매국 외교라고 강하게 비판했고, 5월 9일을 국치기념일로 정했다. 또 반일 단체를 조직해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승전국이 된 중국은 1919년 종전 후 세계 질서를 논의한 파리 평화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해 21개조 요구의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및 프랑스와 일본은 중국에 대한 여러 이권을 상호 승인하기로 합의했고 일본은 21개조 철회를 거부했다. 결국 1919년 4월 21일 강화 회의에서는 장래 ‘중국으로 반환하는 것을 전제로’ 산둥 이권을 일본에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 산둥 이권과 21개조 요구 문제는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이때 21개조 가운데 산둥 이권 부분들은 이미 실효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이 포기했다. 일본은 보류하고 있던 제5호를 전면 철회하는 등 몇 가지를 양보했지만, 뤼순과 다롄의 조차 권리는 유지했다. 이로써 1945년까지 일본은 뤼순과 다롄을 통치하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