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4. 사회신분제의 동요1) 노비제의 변화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1. 청의 간섭
          • 1) 청의 주차관 임명
          • 2) 청의 외교 및 내정간섭
          • 3) 청의 경제이권 확장
          • 4) 경제적 영향
        • 2. 조선의 대외관계
          • 1) 조·일관계
          • 2) 조·미관계
          • 3) 조·러관계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1. 통치기구의 재정비
        • 2. 민씨척족정권의 시정
        • 3. 독립외교의 추진
        • 4. 개화정책의 추진과 좌절
        • 5. 외국인 고문의 고빙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1. 개항 후의 국제무역
          • 1) 불평등조약 체계의 성립
            • (1) 일본에 의한 개항과 무관세무역
            • (2) 청의 속방화정책과 불평등조약체계의 성립
          • 2) 국제무역의 추이(1876∼1894)
            • (1) 개항 이전의 국제무역
            • (2) 일본의 독점무역기(1876∼1882)
            • (3) 청·일 경쟁무역기(1883∼1894)
          • 3) 외국 상인의 침투와 조선 상인층의 대응
            • (1) 일본 독점무역기(1876∼1882)
            • (2) 청·일 경쟁무역기(1883∼1894)
            • (3) 조선상인층의 대응과 변모
        • 2. 국내적 상품유통의 변동
        • 3. 방곡령실시의 사례와 원인
          • 1) 제1기(1876∼1884)
          • 2) 제2기(1884∼1894)
          • 3) 제3기(1895∼1904)
        • 4. 사회신분제의 동요
          • 1) 노비제의 변화
            • (1) 제도적 변화
            • (2) 노비 호구의 변화
          • 2) 중간신분층의 동향
          • 3) 양반 신분의 동향
            • (1) 양반 호구의 변화
            • (2) 양반 신분의 동요와 분화
        • 5. 개항기 지주제와 농업경영
          • 1) 개항 후 농업변동의 요인
            • (1) 통상무역의 확대와 농촌사회
            • (2) 정부 지배층의 농업문제 인식과 농업정책
          • 2) 지주제의 유형과 동향
          • 3) 농업생산과 지대의 변화
          • 4) 1894년 이후 지주제 전망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1. 동학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 1) 개항 이후 미곡수출의 증대와 지주경영의 강화
          • 2) 일·청상의 침투와 제국주의적 상품유통구조의 창출
          • 3) 부세운영의 변화와 농민몰락의 심화
          • 4) 향촌사회의 변동과 농민항쟁의 고양
        • 2. 동학교조 신원운동
          • 1) 동학교단의 조직과 운영
          • 2) 교조신원운동의 전개
            • (1) 공주취회
            • (2) 삼례취회
            • (3) 광화문복소와 척왜양방문 게시운동
            • (4) 보은취회와 금구취당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1. 동학농민군의 봉기
          • 1) 고부민란
            • (1) 고부민란의 배경
            • (2) ‘사발통문’ 거사계획
            • (3) 고부민란의 전개
            • (4) 관권의 대응
            • (5) 고부민란의 농민전쟁으로의 발전
          • 2) 전봉준의 기병과 격문
            • (1) 무장기포
            • (2) 고부점령
            • (3) 백산대회
        • 2. 동학농민군의 격전
          • 1) 관군의 남하와 황토현·장성전투
            • (1) 농민군의 진군과 감영군의 출동
            • (2) 황토현전투
            • (3) 경군의 남하와 농민군의 남행
            • (4) 장성전투
          • 2) 전주성의 점령과 화약
            • (1) 전주성 점령
            • (2) 완산전투
            • (3) 전주화약
        • 3.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
          • 1) 조세수취체제에 대하여
            • (1) 조세수취제도 전반에 관하여
            • (2) 전정에 관한 요구조항
            • (3) 군정에 관한 요구조항
            • (4) 환곡에 관한 요구조항
            • (5) 잡세·잡역에 관한 요구조항
            • (6) 전운영에 관한 조항
            • (7) 탐관오리에 관한 요구조항
          • 2) 무역·상업 문제에 대하여
            • (1)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대하여
            • (2) 국내상업문제에 대하여
          • 3) 기타 정치적 요구조항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1. 집강소의 설치
          • 1) 휴전과 집강소의 설치(5월 8일∼6월 15일경)
          • 2) 집강소 설치의 전면화(6월 15일경∼7월 5일)
          • 3) 집강소의 공인 (7월 6일∼10월)
        • 2. 집강소의 구성과 조직
        • 3. 집강소의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1. 동학농민군의 재기
          • 1) 남접농민군의 재기
          • 2) 북접농민군의 기포
        • 2. 반일투쟁의 전개
          • 1) 반일투쟁의 발발
          • 2) 남·북접 연합과 봉기의 확산
          • 3) 관군 및 일본군의 남하
          • 4) 농민군의 북상과 공주전투
          • 5) 항일연합전선의 추진
          • 6) 농민군의 후퇴와 농민전쟁의 좌절
        • 3.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
          • 1) 결합의 유대
          • 2) 경제적 지향
          • 3) 국가·민족·국민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노비 호구의 변화

 노비는 조선 후기에 들어와 호와 인구의 양면에서 감소 추세를 나타내었다. 지금까지 호적 분석을 통해 알려진 노비 호구의 구성비를 종람할 수 있도록 모아 보면<표 1>에 제시되어 있는 것과 같다.0459)

  年 度 人 口 地 域 硏 究 者 備 考
1606   41.66 山 陰 盧 鎭 英 賤民
1606 18.18 64.37 丹 城 韓 基 範 賤民
1609   47.0 蔚 山 韓 榮 國 東·西·南·北面
1630   34.53 山 陰 盧 鎭 英 賤民
1663 53.5   서 울 Wagner 北部
1672 10.8   金 化 Shin 賤民
1678   56.4 丹 城 金 泳 謨  
1678 46.7   丹 城 李 俊 九  
1684 46.0   蔚 山 金 泳 謨 內廂面
1690 37.1 43.1 大 邱 四 方 博  
1711 8.2   彦 陽 朴 容 淑 賤民
1717 27.6 45.0 丹 城 朴 容 淑  
1717 25.9   丹 城 李 俊 九  
1720   44.1 丹 城 金 泳 謨  
1729 13.93 31.03 蔚 山 鄭 奭 鍾 農所面
(16) 1729 26.5   蔚 山 Somerville 柳浦·農所·凡西面
(17) 1732   43.0 丹 城 金 泳 謨  
(18) 1732 26.6 32.4 大 邱 四 方 博  
(19) 1738 20.6   尙 州 金 容 燮 賤民
(20) 1753 16.8   蔚 山 Somerville 柳浦·農所·凡西面
(21) 1759   28.2 丹 城 金 泳 謨  
(22) 1759 17.6   丹 城 李 俊 九  
(23) 1765 7.73   蔚 山 Somerville 柳浦·農所·凡西面
(24) 1765 2.0 17.07 蔚 山 鄭 奭 鍾 農所面
(25) 1771 7.5   蔚 山 金 泳 謨 內廂面
(26) 1783 5.0 15.9 大 邱 四 方 博  
(27) 1786 8.8 25.9 丹 城 朴 容 淑  
(28) 1786   26.2 丹 城 金 泳 謨  
(29) 1786 7.7   丹 城 李 俊 九  
(30) 1798 1.4   彦 陽 朴 容 淑 賤民
(31) 1804 0.54   蔚 山 Somerville (柳浦·)農所·凡西面
(32) 1804 0.92 22.99 蔚 山 鄭 奭 鍾 農所面
(33) 1825   3.5 鎭 海 武田幸男 賤民·男丁
(34) 1825   4.4 鎭 海 武田幸男 賤民·男丁 東·西面
(35) 1825 2.1 10.5 丹 城 井上和枝 男丁
(36) 1858 1.5 31.3 大 邱 四 方 博  
(37) 1861 0.3   彦 陽 朴 容 淑 賤民
(38) 1867 0.56 14.39 蔚 山 鄭 奭 鍾 農所面
(39) 1876   2.6 鎭 海 武田幸男 賤民·男丁 東·西面
(40) 1882 0.0 14.5 丹 城 井上和枝 男丁 新等·法勿也面
(41) 1885 0.0   蔚 山 金 泳 謨 內廂面

<표 1>朝鮮後期 奴婢戶口構成比의 變化:槪觀 (단위:%)

*비고란에서 ‘賤民’은 연구자가 분류를 賤民으로 하였음을 뜻함. ‘男丁’은 인구 통계에서 男丁만 계산하여 婢子가 빠져 있음을 나타낸 것임.

 <표 1>은 시기적으로 17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걸쳐 있다는 점에서는 만족스러우나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있는 점, 戶와 口를 동시에 제시하고 있는 연구 사례가 적다는 점 등에서 일정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표 1>으로부터 일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은 獨立奴婢戶의 감소 현상이 조선 후기 전체를 일관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18세기 전반과 후반 사이에 커다란 감소현상을 보이고 있다. 독립노비호는 18세기 후반 이후 급격히 감소하여 19세기말에 이르면 적어도 호적대장 상으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볼 수 있다. 지역별로는 노비호에 대한 통계가 가장 많이 밝혀져 있는 蔚山 지역의 경우, 대체로 18세기 후반에는 10%이하에 머무르고 있으며 19세기에는 1% 이하로 그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丹城 지역도 1717년의 27.6%에서 1786년에는 8.8%로 급감하고 1825년에는 2.1% 정도에 그치고 있다. 大邱 지역에서도 1690년과 1732년에 각각 37.1%와 26.6%의 비율이었던 것이 1783년에 5%로 떨어지고 다시 1858년에는 1.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노비 인구의 구성비 상의 변화는 독립노비호의 그것과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표에서 보는 것처럼, 대구·울산·단성 세 지역 모두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노비 인구의 비율이 현저히 감소하였다. 그러나 대구와 울산의 경우를 볼 때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더 이상 그러한 경향이 진전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1858년의 대구와 1804년의 울산의 경우 역으로 그 비율이 증가되어 나타났다.

 <표 2>는 호적대장을 통해 추적할 수 있는 19세기 단성현 2개 면의 노비호구의 변화를 男丁에 국한하여 나타낸 것이다. 표에서 보듯이 노비호는 19세기에 이르러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소수만 잔존한 상태에서 소멸의 길을 밟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노비 인구는 19세기 중반까지 증가하여 1861년에 이르러 2개 면 모두 1825년 대비 2배 이상 그 수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노비 인구 추세의 ‘反轉 현상’은 호적대장에 등재된 전체 호수나 인구는 줄어드는 상황과도 잘 대비된다.

  新 等 面 法 勿 也 面
戶 數 人 口 戶 數 人 口
面全體 面全體 面全體 面全體
1825

1846

1861

1882
9

7

1

0
345

314

277

173
54

97

114

54
624



345
0

0

0

0
566

495

494

374
47

93

119

81
914



583

<표 2>19世紀 丹城縣 新等·法勿也面 奴婢戶口의 變化(男丁)

*자료:井上和枝, 위의 글, 13∼17쪽에서 재구성.

 이와 같이 노비 인구는 17세기 이후 감소 추세를 나타내면서 18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현저한 감소 현상을 겪게 되지만, 이후로는 대체로 안정 국면에 들게 되고 지역에 따라서는 ‘반전 현상’을 보이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러한 노비 인구의 추이는 外居奴婢와 率居奴婢를 구분하여 고찰할 때 좀 더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다음<표 3>은 大邱(四方博)·蔚山(鄭奭鍾)·彦陽(朴容淑)의 사례를 토대로0460) 첫 해의 노비수를 기준(100)으로 삼아 ‘獨立’(외거)노비와 ‘從屬’(솔거)노비가 시기별로 어떤 추이를 보이는가를 재구성하여 나타낸 것이다. 전반적인 인구증가율과 관련된 측면은 여기서 고려되어 있지 않다.

 <표 3>의 大邱 사례를 보면, 1690년과 1732년경 사이에 전체 노비수가 13% 가량 감소하고 있는데, ‘독립’ 노비는 35% 가량 감소하지만 ‘종속’ 노비의 수는 오히려 1.5배 가량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진행된 노비 인구의 감소는 어디까지나 ‘독립’ 노비의 감소 경향이 반영된 것이며, ‘종속’ 즉 솔거노비의 수는 오히려 증가하였다. 1786년경에 이르면 ‘독립’ 노비는 더욱 크게 감소하여 1690년의 8.7% 규모에 지나지 않고, ‘종속’ 노비도 1732년경과 비교할 때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1858년의 경우, ‘독립’ 노비는 1690년 대비 2.3%에 지나지 않게 되어 거의 소멸상태에 이르지만, ‘종속’ 노비는 오히려 대폭 증가하여 이전 어느 시기보다도 많은 숫자를 기록하였다.

 蔚山 農所面의 경우, 1729년과 1765년 사이에 ‘독립’ 노비가 격감하고 ‘종속’ 노비도 절반 가까이 줄어 들었다. 이후 ‘독립’ 노비는 계속 감소하여 1804년 이후 1729년 대비 3% 이하로 줄어 들었지만, ‘종속’ 노비는 1765년과 1804년 사이에 크게 늘어나는 反轉 현상을 보였고 다시 줄어든 1867년에도 1765년의 수준에 가깝게 유지되고 있다. 彦陽의 경우는 18세기 초에 비해 18세기 말의 전체 노비수가 오히려 늘어난 사례인데, 이는 ‘독립’ 노비 수가 격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속’ 노비 수가 170% 가량 크게 늘어난 데서 기인한다. 이 지역에서도 18세기 중후반의 어느 시기에 전반적인 노비 인구 감소 현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자료의 한계로 인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후 1861년에 이르면 ‘독립’ 노비는 완전히 소멸된 것으로 나타나지만, ‘종속’ 노비의 규모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서 전체 노비의 수도 1711년 대비 97.4%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大 邱 蔚 山 彦 陽
年度 獨立 從屬 總數 年度 獨立 從屬 總數 年度 獨立 從屬 總數
1690 100

(3,875)
100

(1,333)
100

(5,208)
1729 100

( 234)
100

( 555)
100

( 789)
1711 100

( 526)
100

(809)
100

(1,335)
1729

1732
65.5

(2,524)
150.8

(2,010)
87.1

(4,534)
1765 15.0

( 35)
51.4

( 285)
40.6

( 320)
1783

1786
8.7

( 338)
85.5

(1,140)
28.4

(1,478)
1804 3.0

(  7)
87.9

( 488)
62.7

( 495)
1798 34.8

( 183)
170.5

(1,379)
117.0

(1,562)
1858 2.3

( 91)
208.6

(2,780)
55.1

(2,871)
1867 2.6

(  6)
51.7

( 287)
37.1

( 293)
1861 0.0

(  0)
160.7

(1,300)
97.4

(1,300)

<표 3>朝鮮後期 地域別 獨立·從屬奴婢數의 推移

*( )안은 奴婢 實數(名).

 요컨대, 이 세 지역 사례를 통해서 볼 때, 조선 후기 동안 진행된 노비 인구의 감소는 ‘독립’ 노비의 격감에 의해 주도된 것, 그리고 노비 인구 추세의 反轉 현상이 나타날 경우 이는 곧 ‘종속’ 노비의 증가에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9세기 중반의 ‘종속’ 노비 수는 18세기 초엽에 비해 오히려 더 늘어난 상태이거나(대구·언양) 18세기 중반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어서(울산), 이 시기에 이르러서도 노비제에 기초한 신분 관계는 해체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호적대장을 토대로 파악된 이러한 ‘독립’ 노비와 ‘종속’ 노비의 상태는 외거노비와 솔거노비의 개념으로 바꾸어 적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상 살펴본 바 조선 후기 노비 호구의 변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전체적으로 戶와 人口의 양면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되어 갔다. 戶의 감소는 급격히, 인구의 감소는 상대적으로 완만하게 진행되었다. 노비 호구의 감소 현상은 18세기 후반에 현저히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대개 외거노비에 해당하는 독립노비호는 18세기 후반 이래 급격히 감소하여 19세기에는 거의 소멸 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솔거노비도 감소 추세에 있었지만 그다지 커다란 동요는 겪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후반 이후에 보이는 노비 인구의 상대적 안정화 경향은 대체로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노비 호구의 감소 경향을 낳은 요인으로는 앞서 서술한 바 1801년의 내시노비 해방, 일련의 면천·종량의 기회 확대, 1731년에 확립된 ‘노양처소생종모역법’ 등과 같은 제도적 요인과 함께,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광범한 노비 도망과 身分冒稱 등 노비의 처지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적 차원의 노력들을 들 수 있다.

 특히 외거노비의 경우 그 일반적 유형이 조선 후기에는 상전에 대해 신공의 의무만 부담하는 소농민이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0461) 외거노비는 소경영에 의한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사회적 존재양태의 면에서는 양인 농민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되어 갔고, 대부분 면천·속량의 확대로 양인화되어 노비호 격감의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외거노비의 경제적 자립성 강화 경향을 조선 후기 노비 호구 감소의 요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솔거노비는 상전의 직접적 통제를 받으며 예속되어 있었고, 노비의 처지를 벗어날 여러 수단들에 접근할 기회가 제약되어 있었다. 대개 양반 신분인 노비소유자의 편에서도 솔거노비는 생활양식의 유지를 위한 조건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노비소유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부심하였을 것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지역에 따라 나타나는 솔거노비 수의 ‘반전’ 현상은 대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으나, 앞으로 이 현상을 해명하기 위한 정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노비 호구 감소의 결과, 19세기에 이르러 외거노비는 거의 소멸하고 솔거노비가 노비의 대부분을 점하며 잔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노비제의 구성적 범주는 사노비 중 솔거노비와 내시노비 혁파 당시 제외된 공노비 중 각관노비의 두 범주로 대별됨으로써 이전 시기의 노비제와는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노비제의 본질적 부분에 속하는 솔거노비가 해체되지 않고 상당한 규모로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노비제 해체에 도달하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1894년 농민전쟁에서 전개한 노비제 폐지 운동과 개화파 정부에 의해 단행된 노비제의 법적 폐지 조치는 아직 그 여신이 남아 있는 노비제의 역사에 일대 타격을 가하였다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0459)표를 작성하는 데 참고한 문헌은 池承鍾,<朝鮮後期社會와 身分制의 動搖>(≪韓國의 社會와 文化≫10, 1989), 30쪽 참조. 井上和枝,<李朝後期慶尙道丹城縣の社會變動-學習院大學藏丹城縣戶籍大帳硏究->(≪學習院史學≫23, 1985)의 분석결과를 추가함.
0460)大邱의 경우 甘勿川·月背·西下 등 3개 면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제외하였다. 蔚山은 農所面에 국한되며, 彦陽의 경우는 私奴婢만 반영되어 있다.
0461)이하 朝鮮後期 外居奴婢에 대한 서술은 全炯澤, 앞의 글 참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