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민평등권론
독립협회의 자유민권사상은 먼저 國民平等權論으로 제기되었다. 우리 나라에서의 국민평등권 개념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하여 士·農·工·商에 대한 四民平等 의식으로 발생되었고, 갑신정변 주도자들은 개혁요강에 ‘인민평등의 권리’를 명문화하였다. 개화사상가 유길준은≪西遊見聞≫에서 천부의 인간평등권을 명료하게 주장하였다.
인간의 권리는 天授한 公道이니, …사람 위에도 사람 없고 사람 밑에도 사람 없으니, 천자도 사람이요 필부도 사람이다(兪吉濬,<人民의 權利>,≪西遊見聞≫, 景仁文化社 影印本, 1969, 114쪽).
독립협회 회원들도 “만인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평등하게 태어났으며”,0682) “누구나 하나님께서 받은 사람의 권리는 같은 것이다”0683)고 하여 천부인권론에 의해 인간평등권을 주장하고, 나아가 국가적 차원에서 국민평등권을 주장하였다.
독립협회의 국민평등권론은 무엇보다도 신분제도 철폐론으로 주장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정부는 개혁요강에서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할 것”이라 하여 차별적인 신분제도를 타파하려 하였다. 갑오개혁 추진자들은 개혁법안을 통하여, 문벌·반상등급의 철폐, 공사노비법의 폐지, 인신매매의 금지, 귀천을 불구한 인재등용, 평민에게 제한된 범위의 참정권 인정, 법 앞에서 모든 국민의 평등을 규정하여, 전통적 신분질서를 타파하려 하였다.0684)
독립협회 회원들은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하는 것은 의리상 대단히 불가하다”0685), “사람의 목숨이 지극히 귀하니 남에게 종이 되고 살기는 지극히 귀한 인명을 천하게 대접하는 것이요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죄를 얻음”0686)이라는 제목의 토론회에서 인신매매와 인간차별을 죄악으로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평등사상에 기초하여, 이미 갑오개혁에 의하여 법률적으로 폐지된 반상제도와 노비제도 등 신분제도를 현실적으로 철폐할 것을 역설하였다.0687) 독립신문은 창간호 논설을 통하여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 위하여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것”임을 천명한 바 있다.0688) 그리고 다른 논설을 통하여, 법률이란 상하·귀천·빈부·세력의 유무를 불문하고 공평하다는 논리에 의거, 사람은 누구나 법적으로 동일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는 법률 적용의 평등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0689) 나아가 독립협회 회원들은 신분의 차별없이 전국 인민에게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하고, 능력에 따라 공무담당을 균등하게 해야 한다고 하여 국민의 기회균등을 주장하였다.0690)
독립협회의 국민평등권론은 신분제도 철폐론과 동시에 남녀평등론으로도 주장되었다.
일찍이 갑신정변의 주도자인 박영효는 인권과 민권의 보장 조치로서 班常·中庶의 등급 폐지와 함께 남녀·부부의 권리균등을 강조하고, 남성의 축첩 허용과 여성의 개가 금지의 잘못을 지적한 바 있다.0691) 갑오개혁으로 남녀조혼의 금지, 과부재혼의 허용, 남편의 부인에 대한 강폭 금단 등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법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0692) 이러한 맥락에서 독립협회 회원들은 조선에서의 남녀차별과 남성의 여성 압제 풍속을 야만적이고 죄악적인 행위라고 규탄하고, 여성의 지위 특히 남성의 부속적 상태에 있는 부인의 지위와, 처첩을 인정하는 일부다처적인 혼인관계의 비윤리성을 비판하였다.0693) 그리고 그들은 유럽 각국이 몇 백년 전에 “남녀를 같은 학문으로 교육시키고, 남녀에 동등권을 주었기 때문에 國富民强해졌으며, 하나님은 남녀를 동등하게 태어나게 했다”는 논거를 들어, 조선도 마땅히 남녀에게 동등한 학문과 교육을 부여하여 남녀평등권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694)
본래 평등의 원칙은 서구에서는 자유주의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서 특권계급의 철폐와 시민계급의 평등한 참정권과 법률 적용의 평등을 그 내용으로 한 시민계급의 해방을 위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0695) 독립협회는 이러한 서구의 평등사상을 수용하고 천부인권론에 입각하여, 신분의 차별·남녀의 차별 등 전통적 차별질서를 극복하고 국민평등권을 실현코자 하였다.
0682) | ≪독립신문≫, 1897년 10월 16일, 논설. |
---|---|
0683) | The Independent, December 5, 1896, Editorial. |
0684) | 柳永益,<甲午更張과 社會制度 改革>(≪韓國社會發展史論≫, 일조각, 1992), 260∼261·265·269·281·293∼295쪽 참조. |
0685) | ≪독립신문≫, 1897년 11월 1일,<독립협회 토론회 제목>. |
0686) | ≪독립신문≫, 1898년 2월 13일,<독립협회 토론회 제목>. |
0687) | 班常制度에 대해서는≪독립신문≫, 1896년 6월 18일, 논설과 1898년 3월 31일, 논설 참조. 奴婢制度에 대해서는≪독립신문≫, 1897년 10월 16일, 논설과 11월 1일,<독립협회 토론회 제목>참조. |
0688) | ≪독립신문≫, 1896년 4월 7일, 논설. |
0689) | ≪독립신문≫, 1896년 7월 11일, 논설. |
0690) | ≪독립신문≫, 1896년 12월 22일, 논설. The Independent, December 22, 1896, Editorial. |
0691) | <朴泳孝 上疏文>(≪亞細亞學報≫1, 아세아학술연구소, 1965) 중 使民得當分之自由以養元氣 참조. |
0692) | 柳永益, 앞의 글, 281쪽. |
0693) | ≪독립신문≫, 1896년 4월 21일, 논설 및 6월 6·16일, 논설. |
0694) | ≪독립신문≫, 1898년 1월 4일, 논설. |
0695) | 文鴻柱,≪韓國憲法≫(법문사, 1970), 17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