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5권 신문화 운동ⅠⅢ. 근대 문학과 예술2. 근대 예술의 발전1) 음악(2) 근대음악사의 전개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1. 근대 교육의 성립
          • 1) 근대 교육 성립의 역사적 배경
            • (1) 개화정책의 추진과 신교육 수용론 대두
            • (2) 동도서기주의적 신교육 수용의 실패
            • (3) 선교사의 교육활동과 교육평등의식 계몽
            • (4) 변법개화파의 국민교육론 전개
          • 2) 근대적 국민교육제도의 성립
            • (1) 교육제도와 관리등용제도의 개혁
            • (2) 근대적 국민교육제도 정립
        • 2. 근대 교육의 발전
          • 1) 근대 교육의 이념
            • (1) 실용주의 교육 지향
            • (2) 자강주의 교육
          • 2) 근대 학교의 설립
            • 가. 정부의 근대학교 설립
            • 나. 전·현직관료 및 황제 측근세력들의 사립학교 설립
            • 다. 개항장 상인 및 유지 신사들의 사립학교 설립
            • 라. 요호·부민·유생 층의 학교 설립
            • 마. 선교사들의 학교 설립
            • 바. 구국계몽단체·학회 및 관련인사들의 학교 설립
            • 사. 불교와 천도교 종단의 사립학교 설립
          • 3) 근대 학교의 교육내용
        • 3. 근대 교육의 확대
          • 1) 통감부의 교육 침략
            • (1) 우민화교육 방침
            • (2) 동화정책의 방법으로서의 보통학교 확장
            • (3) 일본어 보급
            • (4) 교과를 통한 친일교육
            • (5) 일본인 교원배치
          • 2) 민족사학의 발전과 설립 이념
            • (1) 민족사학의 발전
            • (2) 민족사학의 설립이념
          • 3) 여자 교육의 발전
            • (1) 미션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 (2) 관립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 (3) 민간인 사립여학교의 설립과 교육
          • 4) 고등교육의 성립
            • (1) 민립대학의 설치운동과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 (2) 기독교계 전문학교의 대학승격운동
          • 5) 교육내용의 추이
            • (1) 애국교과와 훈화를 중심으로 한 교육내용
            • (2) 창가와 체육을 중심으로 한 교육내용
        • 4. 교육구국운동의 추진
          • 1) 근대 교육의 성격
            • (1) 근대 교육의 성격
            • (2) 근대 민족 교육의 확대
          • 2) 구국교육운동의 실태
            • (1) 사립학교의 설립
            • (2) 설학취지문의 검토
            • (3) 간도지역의 민족교육운동
            • (4) 역사교육의 확대
            • (5) 체육교육의 보급과 운동회의 개최
            • (6) 애국가와 독립가의 보급
        • 5. 근대적 교과서의 편찬
          • 1) 근대 교육 성립기의 교과서
          • 2) 근대 교육의 발전과 교과서
            • (1) 근대학교의 교육내용<교과목>
            • (2) 정부의 교과서 편찬
            • (3) 민간인에 의한 교과서 편찬과 실태
            • (4) 교과서의 내용
          • 3) 통감부하의 교과서
            • (1) 일제의 교육침략정책
            • (2) 학제의 개편
            • (3) 통감부의 교과서 통제
            • (4) 구국교육운동과 민간의 교과서 편찬
            • (5) 교과서의 실태
            • (6) 교과서 사용 실태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1. 근대 학문의 수용
          • 1) 서양 근대 학문의 세 수용통로
          • 2) 서양철학의 수용
          • 3) 사회진화론의 수용
          • 4) 사회과학의 수용
          • 5) 서양 인문사회과학 수용의 특징과 문제점
        • 2. 한국어 연구
          • 1) 언문일치의 첫걸음
            • (1) 두 문체의 대립
            • (2) 국한문체
            • (3) 국문체
          • 2) 초기의 국문 연구
            • (1) 지석영의<국문론>과<신정국문>
            • (2) 리(이)봉운의≪국문졍리≫(국문정리)
            • (3) 주시경의<국문론>과 그 뒤의 연구
            • (4) 이능화의<국문일정의견>
          • 3) 국문연구소의 업적
            • (1) 국문연구소에 관한 자료
            • (2) 개설의 동기와 목적
            • (3) 직원과 운영
            • (4) 사업의 경과
            • (5)<국문연구 의정안>
            • (6) 각 위원의 연구안
          • 4) 문법의 연구
            • (1) 서양인의 연구
            • (2) 유길준의≪대한문전≫
            • (3) 주시경의≪국어문법≫
            • (4) 어윤적의 연구
            • (5) 김희상의≪초등국어어전≫
          • 5) 주시경의 국어 연구
        • 3. 한국사 연구
          • 1) 연구의 필요성
          • 2) 근대 한국사 인식의 추이
            • (1) 실학시대 후기에서 개항기의 역사학
            • (2) 개화기 계몽주의 역사학
          • 3) 민족주의 사학의 성립
            • (1) 일제 식민주의 사학의 침투
            • (2)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성립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1. 근대 문학의 발전
          • 1) 개화기의 시대적 과제와 문체, 문학장르의 관련
            • (1) 위정척사파
            • (2) 온건보수파
            • (3) 개화자강파
            • (4) 일본체험파
            • (5) 민중계몽파
            • (6) 친기독교 개화파
          • 2) 개화기의 시가 장르
            • (1) 애국·독립가
            • (2) ‘사회등’ 가사를 비롯한 우국가
            • (3) 민요 개작
            • (4) 개화기의 시조와 가사
            • (5) 신체시
          • 3) 개화기의 서사 장르
            • (1) 신소설
            • (2) 역사·전기 소설
            • (3) 토론체 소설
        • 2. 근대 예술의 발전
          • 1) 음악
            • (1) 한국음악사회 구성
            • (2) 근대음악사의 전개
            • (3) 새로운 과제
          • 2) 미술
          • 3) 연극과 영화
          • 4) 무용
            • (1) 무도의 등장
            • (2) 권번춤의 무대화와 가무극의 번성
          • 5) 체육
            • (1) 학교체육의 전개양상
            • (2) 근대 스포츠의 소개
            • (3) 체육단체 결성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라. 제4기

 한국근대음악사 전기 제4기는 1904년 2월부터 1910년 8월까지 6년 6개월간의 기간이다. 밖으로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한 기초작업을 닦아 가는 시기라고 한다면, 안으로는 항일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민족이 국권회복을 위한 시기이다.

 우리 나라의 민악과 교방사(1897년에 장악원에서 직제개편) 음악 그리고 군악대·곡호대 등을 일본이 약화시키는 한편 공립학교를 통하여 일본의 ‘쇼오카(唱歌)’와 ‘온가쿠(音樂)’를 음악교육으로 삼아 민족정서 해체를 획책한다. 그 강압성은 또 음악인을 기생조합으로 재편하는 등 우리 나라 전 음악분야에 나타난다. 반면, 민중들은 애국적인 노래운동으로 맞서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적 계몽운동을 펼쳐 나간다. 학교설립을 통한 신교육운동이 노래를 통하여 대중들을 계몽하면서 민족적 자각을 높이려 이 기간 문화운동의 정점을 이룬다. 한편 의병들이 전국에서 일본과 무력투쟁을 시도하며 점차 국내외에서 항일의 독립군으로 발전한다. 여기에 의병가를 비롯 항일가 등이 항일의병투쟁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시기≪최병두타령≫과 같이 반봉건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창극운동은 괄목할 만한 운동이었다. 한편 서양음악을 자주적으로 수용하고 조선음악을 체계적인 교육으로 발전시키는 ‘조양구락부’(후에 조선정악전습소)가 이 기간 마지막에 창립되었다.

가) 음악의 식민지 위기

 제4기는 일본의 억압책으로 우리 음악은 위기를 맞는다. 첫째는 정부 소속의 교방사와 군악대·곡호대 등이 직제개편으로 약체화되고 음악예술인들이 통제받는다. 둘째는 자본을 장악한 일본인들이 각종 음악단체를 예속시켜 음악계를 관장한다. 셋째는 일본의 ‘쇼오카’와 ‘온가쿠’로 음악교육이 이루어지면서 일본정서화를 획책한다.

(가) 직제개편

 통감부의 관제개편은 음악기관으로 이어저 약체화를 면치 못한다. 지금까지 예조에 부속된 掌樂院이 1894년에 宮內府에 흡수되었다가, 대한제국이 성립하는 1897년 이후에는 장악원 장례원과 協律課로 흡수되었고, 이어서 1900년 6월 19일에 협률과가 교방사로 바뀐다.453) 그 인원도 722명이었으나 1905년 3월 4일에 장례원이 폐지되고 ‘禮式院’ 신설과 함께 ‘예식원 장악과’ 내로 교방사가 흡수되어 일본의 통제권에 들어간다.454) 1907년 9월 1일에는 군부 소관의 ‘군악대’가 장례원 소속으로 바뀌고, ‘帝室軍樂隊’로 개정된다.455) 자주적인 대한제국 군대의 ‘군악대’가 아니라 궁내부 예식 군악대로 축소된 것이다. 대한제국은 어느 사이에 궁내부 ‘제실’이란 이름으로 약체화되었다. 이것은 1907년 7월 31일 통감부가 조선의 군대해산과 조선의 궁내부 장악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군대해산과 궁내부 관제가 일본 통제하에 개정되면서 음악기관도 약체화를 면치 못한다. 장례원은 기존의 예식원에서 개편되었을 때에 주요 변화가 생겼다. 일제 의도대로 조선음악과 서양음악의 용어가 일본용어로 바뀌는 음악사적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456)

 즉 조선음악의 직책을 ‘國樂師長’과 ‘國樂師’로 하고 ‘國樂 교수 및 國樂에 종사’하게끔 하여 李南熙·明完壁·金仁吉 등을 임용하였다. 또 서양음악은 ‘국악’용어와 다른 ‘樂師長’이나 ‘樂師’로 직책화시키고 ‘음악교수 및 음악에 종사’케 하고 白禹鏞·姜興俊·金昌熙를 임용하였다. 조선음악은 ‘국악’, 서양음악은 ‘음악’으로 구분한 기준이 현재까지 이어저 오는 이 용어의 구분은 바로 일제에 의해서였다. 또 “국악사장이 국악 교수와 주악을 맡고, 국악사가 국악에 종사한다는 내용처럼 우리 나라 아악이나 향악 등의 장악원 음악을 ‘국악’이란 용어로 직제 변경을 하였다. ‘국악’이란 용어가 ‘아악류의 나라 음악’이란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457) 이 경우는 일제가 ‘일본식’으로 개편하여 조선음악을 약체화시키고 일본의 가가쿠(雅樂)로 대신하려는 다른 뜻이 숨어 있었으며, 그것은 조선을 식민지 정서기반으로 구축하려는 뜻이었다. 특히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이었던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 1853∼1926)가 1904년 9월 30일에 들어와서 1907년 11월 9일 서울을 떠날 때까지 4년 넘게 궁내부의 사사로운 일과 제사, 궁내부 관련자들의 진퇴, 정부의 조선인 관리 등용규칙, 봉급령 정리, 일본관리를 간부로 임용하는 문제, 은행·교통개발, ‘풍속에 관한 문제’, 교육재건과 외국선교사를 통제하는 문제 등을 실제적으로 주도하였다.458) 그는 ‘國樂’과 ‘唱歌’·‘音樂’이란 일본음악용어를 이미 일본 음악교육 현장에 적용한 당사자였다. 이 용어들은 대한제국의 역사적인 용어가 아니라 일본의 용어이다. ‘국악’이나 ‘창가’와 ‘음악’은 일본이 메이지(明治, 1868∼1912) 연간에 일본 현지에서 일반화시킨 용어로, 메가타와 이자와 슈지(伊澤修二, 1851∼1917)의 합동조어이다.459) 1875년 메가타가 일본정부 유학생 감독관으로, 이자와가 유학생으로 미 매사추세츠州의 브리지워터(Bridgewater)사범학교에 유학하고 1878년에 일본으로 귀국한 바 있다. 이자와와 메가타는 그 사범학교에서 음악교육학자인 메이슨(L. W. Mason, 1828∼96)과 벨(G. Bell)을 만나 상호 협력관계를 유지하고,460) 메가타와 이자와가 함께 연명하여 일본 문부성에 ‘쇼오카’실시를 위한 보고서를 1878년부터 올렸다. 그 핵심이 ‘국악의 일으킴(國樂創成)’이었다. ‘국악’은 ‘National Music’의 번역어이었지만, 그 내용은 일본의 국민음악이다.461) 일본에서 ‘국악’의 의미는 전통음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음악과 서양음악을 절충하여 새로운 일본국민들이 부르는 음악으로 발전’하자는 뜻이 담긴 너무나 일본적인 용어이다.462) 일본 근대음악교육은 ‘국악’에 바탕을 둔 근대음악교육이 초등학교 저학년에 적용하는 음악이 ‘쇼오카’이었고, 고학년 이상에게 적용한 음악이 ‘온가쿠’이다. 쇼오카와 온가쿠를 우리 식으로 발음한 ‘창가’와 ‘음악’이 일본통감부에 의해 쓰여진 용어이지 결코 우리 역사에서 발전시킨 용어가 아니다. 더욱이 이자와는 이후 동경사범학교장, 음악취조소장, 문부성 편집국장, 동경음악학교 교장 등을 지내다가 1896년 4월 1일에 대만총독부 민정국 학무부장으로 취임하였고,463) 메가타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시 일본 대장성 主稅局長을 지내면서 일본경제를 주도하다가 1904년 대한제국 재정고문으로 왔다.464) 어느 사이 이들은 ‘일본의 국가주의’에 공조하면서 ‘국악’으로 아시아화를 획책하며, 두 나라의 민족정서를 해체시켜 나갔다. 한편 1908년 8월 24일에는 장례원 장악과의 명칭이 ‘장악부’로 더 약체화되었다.465) 이후 ‘이왕직 아악대’와 ‘이왕직 양악대’로 나뉘고 인원도 189명으로 축소되었다.

(나) 군악대·곡호대 약체화

 이 시기에 가장 뚜렷한 변화는 군악대와 곡호대의 축소개편이다. 그것은 일제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그 기세를 대한제국의 내정 간섭권으로 몰아 재정·외교·군사·학무 등 전 분야에 지배로 나타난 결과였다. 자연히 군악대·곡호대에도 커다란 변동이 생겼다. 시위대에 속한 군악대 1개 중대와 시위기병대 군악대 1개 소대도 감축된다. 직원에서나 군악대의 위상으로서나 또 인원에 있어서 감축되었다. 1907년 6월에 개편한 군악대는 석 달 후인 9월에 궁내부 장례원 소속의 ‘제실군악대’로 흡수되었다.466) 더 이상 군부의 군악대가 아니라 침몰하는 왕실악대로 비운을 맞고 있었다. 한편 친위대 2개 연대의 곡호대나 공병중대와 치중병대의 각각의 ‘나팔수’ 편성도 변동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각 지방에 편성된 진위 6개 연대를 8개 진위대대로 감축하였기 때문에 19개 대대의 ‘곡호대’도 8개의 곡호대로 축소되어 버렸다.467) 또 전국적으로 편제된 나팔대 역시 일제 통감부에 의하여 약체화를 거듭하다가 1907년 이후 해체되어 버렸다. 1908년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의 명칭이 ‘장악부’로 바뀌면서 인원이 축소되자, 음악대로서 1910년 8월 한일합병을 맞았다. ‘이왕직 양악대’는 1915년에 해산할 때까지 우리 나라 근대음악 역사의 영광과 좌절의 산맥을 이루었다.

(다) 일제의 창기-기생조합 조직과 통제

 일제 통감부는 정부의 직제개편 뿐만이 아니라 음악사회 전반을 통제함으로써 식민화의 발판 구축에 이용한다. 1908년 9월에 ‘警視廳令’의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으로 나타났다.468) 1908년 6월 경시청은 이미 시곡동의 조선인들로 하여금 경시총감 앞으로<京城遊女組合設立請願書>를 청원케 하고,469) 유곽화로 통제하고 있었다. 통감부는 일본의 ‘藝娼妓’·‘특별요리점’·‘席貸業’·‘貸座敷’·‘待合’ 등의 일본식으로 유곽업을 하였지만, 러일전쟁 이후 그 수요를 따를 수 없을 뿐 아니라 대한제국의 민족문화를 풍기문란문화로 몰아 약체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유곽화 획책이 이후 민가로 번져 가게 하였다.470) 또 경시청이 발행하는 인가증이나 허가증 없이는 또 각종 여행이나 예술인들의 공연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어서 통감부는 1909년 4월<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을 실행하여,471)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을 중심으로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을 조직케 했다. 1909년 8월 경성에서 320인의 ‘한성창기조합’ 창립도 그 한 예이다. 동시에 관기제도를 폐지시켜 궁내부를 비롯한 전국의 관청에 매인 모든 관기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왔으며, 조양구락부가 설립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472) 창기조합은 1910년 8월 이후 다동조합이나 광교조합 등 기생조합으로 바뀌고 1914년에 일본의 券番 이름을 딴 조선권번이나 한성권번 등이 생기면서 ‘권번’시대가 되었다.473)

나) 식민지 전진기지로서 학교음악교육의 구축

 한국근대음악사에서 가장 놀라운 변화가 제4기 기간, 특히 1906년 ‘제1차 학교령 시행기’(1906. 8∼1909. 8)에 일어났다. 국가가 공·관립학교에 처음으로 ‘唱歌와 音樂’이란 이름의 교과목을 공식화한 점과 처음 있는 그 교과목 내용이 일본의 음악교과 내용으로 대체시킨 점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1906년에 공립학교와 관립사범학교에서 ‘창가’와 ‘음악’을 교과목으로 개설한 것은 한국음악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일반 사립학교의 경우 음악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대개 ‘찬미가’이거나 일본식 창가들이었다. 근대교육 정립은 근대군대 확립과 양대 산맥을 형성할 정도로 정부의 오랜 바람이었다. 국가적인 정책사업이었기 때문에 여러 학교를 신설하고 그 교과목을 두었지만, 1906년에 와서야 비로소 관·공립학교에 음악 교과목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음악 교과목은 조선의 음악문화가 창의성으로 이끄는 교과가 아니라 일본식 교과였다.

(가) 통감부의 제1차·제2차 학교령 시행과 음악교과

 대한제국이 음악을 근대교육으로 확립한 것은 1906년이었다. 그 동안 각급 관립과 공립학교에는 음악 교과목이 없었다. 1906년에 비로소 학교령에 따라 보통학교의 ‘창가’, 고등학교의 ‘음악’, 사범학교 본과의 ‘음악’ 등 교과를 개설하였지만, 고등여학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시의에 따라 채택할 수 있는 교과목이었다. 사립학교도 제1차 학교령의<학부훈령>과<학부고시>에 의하여 ‘창가’와 ‘음악’을 관·공립학교처럼 적용시켰다.

 정부가 1908년 1월 1일자로 ‘관립한성사범학교’에 일본인 고이데(小出雷吉)를 ‘音樂敎授’로 임용하여474) 본과, 예과, 속성과에 재학하거나 졸업예정자들이 ‘音樂’교육을 받았으며, 이들이 관·공립보통학교 현장에서 ‘唱歌’교육을 하였다. 또 ‘풍금’(Organ)이 마련되어 연수받을 기회부여와 참관수업, 또 보통학교 교원(專科 검정) 검정과목에 ‘창가’과목이 개설되었다.475)

 한편 통감부가 주도한 관·공립학교와 달리 사립학교는 ‘항일애국사상의 온상’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일찍부터 음악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왔기 때문에도 그 성격이 관·공립학교과 달랐다. 대한제국기의 시대인들은 국권회복이 교육에 있다고 믿어 수 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다.476) 1908년에 전국적으로 5천 여의 학교가 있었다.477) 특히 기독교계가 전체 사립학교 중에서 거의 절반에 해당할 정도로 많았다.478) 그러나 1908년 8월에 시행한 조선통감부의 ‘사립학교령’은 私學이 더 이상 ‘애국사상의 온상 교육처’가 아니라 조선통감부의 인가를 받는 식민지 교육장으로 통제하기 시작한다. 1910년 5월 20일 學部 편찬의 일본식 창가집 강요나 일본 현지의 음악교육과정도 그대로 적용하였다.

(나) 제1, 2차 통감부 학교령과 음악 교과목의 성격

 조선통감부가 對韓 식민지화를 정착시키려는 정책 중 교육 분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은 민족 주체성을 말살하고 일본 신민으로 동화시킬 수 있는 교육정책이 바로 식민지 예비단계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조선통감부는 2차의 걸친 교육령을 단행하고 식민주의 교육을 위한 법적 정비를 하였다. 음악교육도 예외가 아니다. 1906년 8월부터 제1차 학교령으로 식민주의 교육이 부식되고, 1909년 9월부터 제2차 학교령으로 교육침략을 강화하였다.

 음악교과의 성격은 음악교과에서 나타난다. 학부-통감부가 내세운 음악교과목표는 일본의 음악교과목표 그대로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음악교과목표뿐만 아니라 모든 음악교육정책을 일본 현지대로 적용하였다. 다음은 1900년에 개정된 일본의 음악교육목표를 1906년 한국에 적용하며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게 그대로 적용한 예이다.

평이한 가곡을 唱케 하여 美感을 養하고 德性을 資함으로 要旨를 함이라. 가사 및 악보는 平易 雅正하여 理會키 易하고 且 심정을 快活純美케 할 것을 選함이라

 이 목표는 보통학교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와 사범학교에 적용하였고, 사립 학교령이 시행된 이후 일본식 창가와 음악교육이 전 음악교육계에 작용하였다.

 음악교과 도서의 성격은 음악교과도서에 나타난다. 음악교과도서는 음악교과영역의 학습내용을 학습자의 기본자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한 교재이지만, 그 교재를 만든 사람이나 집단의 성격 그리고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교재내용이나 그 해석을 담아 낸다. 통감부는 1908년 9월에 교과용도서 검정규정과 1909년 2월의 출판법 제정 시행으로 ‘안녕질서 파괴와 풍기문란’을 야기하는 교과용 도서는 불온 교과도서로 규정하고 통제하였다. 조선통감부의 안녕과 풍기를 모범적인 음악교과서가 대한제국 학부 이름으로 1910년 5월 20일에 편찬·발행하였으니,≪보통교육 창가집≫제1집이 음악교과서이다. 이 창가집은 이 기간 조선통감부의 모든 숨은 의도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난다. 이 창가집은 통합 음악교과서로 모든 검인정을 막았고, 민족현실이나 정신을 나타낸 노래는 배제시켰으며, 농촌에서 순수 생산활동을 독려하기 위한 노래가사를 채택하며, 일본 전래의 노래들을 그대로 번역하고 있으며, 한국음악정서를 근본적으로 파괴시키고 일본 정서화를 도모한 창가집이다. 이 창가집은 일본노래 雁(기러기) 뿐만 아니라,<나아가>역시 일본의 ‘수수메 수수메(進め進め)’ 가사 그대로이고,<月>·<兎와 龜>·<學問歌>·<勸學歌>등의 노래가 일본인 작품이었고, 나머지는 서양 악곡을 번역하였다. 또한 요나누키(ヨナ拔キ) 장음계와 일본전통의 민요음계와 율(리츠)음계에다 2박자(duple), 그리고 짧은 노래형식으로 획일화시킴으로서 한국민중들이 역사적으로 발전시켜 온 음악구조를 해체시킬 수 있게 된다.479) 이 모두가 일본이 국가적으로 추구한 ‘國樂창성론’이었고, ‘唱歌’와 ‘音樂’이었다.

다) 민족음악으로서 국권회복운동

 19세기 60년대의 농민항쟁과 90년대의 동학농민전쟁 그리고 대한제국기의 민중운동을 계승하면서 제4기(1904∼1910)에 견고한 국권회복운동으로 전개한 것이 다름아닌 항일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이다.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통하여 전 민중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노래’를 ‘운동’으로 인식하고 실천하였다. 이 시기의 노래는 일회적이거나 상황에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국권회복운동의 중요한 투쟁양식이었다. 그리고 음악전문인들에 의하여 ‘음악으로서 운동’이 형성되었다. 노래운동의 경우는 ‘창가와 민요’가, 음악운동은 ‘창극’이 중심이었다. 전자는 노래가사 바꾸어 부르기로서 창가운동과 민요개작운동이 대표한다면, 후자는 창극≪최병두타령≫이 대표한다. 따라서 창가와 민요 그리고 창극은 의병전쟁이나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의 전 민중들의 강고한 삶의 현장에 살아 있는 민족음악이었다.

 제4기에 각급 학교와 교회, 군대, 연흥사·광무대·단성사·원각사·장안사·음악사·단흥사 등의 상설극장이나 단체, 손탁호텔, 아스토 하우스 호텔의 피아노, 주한외국공사관, 교동의 일본 가부키좌, 청계천변의 중국 경극장, 궁정과 전국의 지방관아와 정·당·정원·사랑방·시장의 가설무대·사찰공간·기방공간 등에서 창가·음악·춤·극·활동사진·만담·연행·판소리와 창극·산조·영산회상·예인집단들의 연희종목과 민악종목 등이 공연되었다. 이 종목들은 창가와 음악교원을 비롯하여 악대출신, 선교사, 전통음악인, 외국인들이 기존의 지배층과 후견인, 그리고 새롭게 부각된 시민들의 지지 속에서 음악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또 새롭게 등장한 사진과 활동사진(영화), 그리고 축음기 등 일본 자본주가 한국에 진출하면서 대중들을 사로잡으며, 각종 공연이 이들 매체와 어울려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기에 김창환·송만갑·박춘재·한성준·김봉업·김인호·이형순·홍도·보패 등이 중심이 되어 1907년 동문 전기철도회사 부속 활동사진소 부설 연극장에 ‘광무대’를 설립하고 전통음악의 전분야에 걸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전 협률사 자리에 설립한 관인구락부와 달리, 1908년 협률사가 개칭하여 새롭게 출발한 원각사는 김창환·송만갑·박기홍·이동백·정정렬·염덕준·김창룡·김초향·이화중선·신금옥·박녹주·김추월·한성준 등 과거 협률사 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270여 명이나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연극과 창극 그리고 정재 등을 가지고 국내와 일본 오사카·쿄토·나고야·도쿄 등까지 순회공연을 하였다. 1907년에 설립된 단성사 외에도 1909년 12월에 조양구락부가 설립되어 전통음악과 양악분야의 인재양성 기관으로 발돋음하면서 1911년에 조선정악전습소로 발전한다.

(가) 음악사회비판

 제4기에 전래의 조선음악공간을 비롯하여 학교·교회·극장·회관·호텔·주한 외교공관 등을 중심으로 전통음악을 비롯한 창가와 찬미가 등의 일악과 양악 등 복합적인 형태로 새로운 수용계층의 문화로 형성되자, 당대의 국권회복운동 차원에서 음악의 사회적, 민족적 기능에 대한 비평행위가 각 분야별로 전개되었다. 첫째는 각급 학교에서 부르고 있는 창가 가사가 한자 투이므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속어로 바꾸고, 또 기존의 민요에다 얹어서 누구나 쉽게 부르도록 각계각층이 비판하고 나섰다. 두 번째는 협률사나 원각사 등의 각종 극장을 통하여 민족음악문화가 활성화되지만, 국권회복운동을 외면하고 음악활동만을 전개하며 국민풍속을 해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폐쇄하거나 개량하자는 비판이 전개되었다. 세 번째는 국권회복의 사회적 비판정신에 힘입어 음악인들이 민족현실에 참여하여≪최병두타령≫과 같이 음악창작무대를 기획하거나, 조선음악을 체계화시키려고 양악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또는 민간전문음악교육기관을 설립(조양구락부-조선정악전습소)하거나, 전국의 기생들이 고아원 돕기 자선공연을 꾸준하게 전개하거나, 일제가 통제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등 일련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끝으로 교회가 정교분리로 이원화시켜 민족현실을 외면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특히 정교분리에 관한 미 북장로교 선교부와 헐버트(B. Hulbert;미 감리교선교사)간의 갈등이 1906년에 첨예화되었다. 이미 장로교공의회는 1901년 9월에 정교분리의 원칙을 세운 바 있다. 이 원칙에 대하여 헐버트는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앙양되는 정의와 애국심은 국가와 나눌 수 없다며 정교분리책을 비판하고 기독교가 민족현실에 앞장설 것을 주장한다.480) 교회의 정치간섭금지와 국가권력에 복종만을 요구하는 듯한 선교부는 기실 1905년 미국과 일본 사이에 맺은 카츠라-태프트밀약을 계기로 변화되고 있었다. 헐버트처럼 지금까지 기독교는 1905년 윤치호가 역술하고 광학서관에서 펴낸≪찬미가≫에<우리 황상 폐하>·<승자신손 천만년은>·<동해물과 백두산이>등의 노래를 민족 찬미가로 게재하여 회중들이 찬송하였으나, 그 이후부터 사라지고 있었다.

(나) 노래운동

 노래운동은 이 시기에 한국 민중들의 국권회복운동으로 자리잡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민중들의 공동체 정서와 의식을 견고하게 하여 항일로 나가는 길에 노래처럼 호소력 있는 양식이 없기 때문에 민중들 속에서 민족의 노래로 불타오른다. 통감부가 李聖植의≪중등창가≫와 李基鐘의≪악전교과서≫저작물을 비롯한 모든 음악을 압수하거나 판매금지, 또는 통제하는 것은 노래가 민족정신을 강고하게 하고, 투쟁양식이 되어 독립고취와 일제항거가 되기 때문이었다.481) 이 노래들이 일제에겐 ‘반체제음악’이자 ‘불량창가’이었다.

 의병노래란 1900년대 전반기에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며 투쟁한 의병들의 노래를 말한다. 그 노래들은 민중들을 계몽하여 독립을 고취하는 실력양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의병들이 창작하고 부른 이 노래들은 반일투쟁 자체의 존재방식이다. 1907년에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각 지방의 군인들이 봉기하면서 새로운 전술과 전투력을 갖추고 민중세력과 하나가 되어 본격적인 의병전쟁이 전개되었다. 즉 신식무기와 함께 노래는 ‘군가식 의병투쟁가’로 전환하여 일본제국주의와 가열찬 전쟁을 펼 수 있었다. 많은 ‘의병가’가 이들의 처절한 항일 현장에 살아 있는 민족의 노래로 만들어졌다. 그 의병가로<의병격중가>·<의병창의가>·<의병대가>·<의병가>·<신태식 창의가>·<기좌창의 군행소 창의가>·<용병가>·<봉기가>등이 널리 불렸다. 항일의병전쟁은 1908년 절정을 이르다가 대규모로 동원된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작전’에 밀려 점차 유격전으로 전환하였다. 이후 만주와 연해주 등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한 이들의 발걸음과 가슴 속에 의병가는 항일 혼불을 태우는 독립의 노래이자 민족의 노래였다. 그만큼 이들은 그 뜻에 두었기 때문에 일본식 창가나 기독교식 찬미가를 민요노래와 함께 이용하였다.

 계몽운동노래란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우리 나라가 실력을 양성하고 근대화가 추진되어야만 국권회복을 할 수 있다고 보아 이를 표현한 노래를 말한다. 이 시기 계몽운동노래가 항일의병투쟁과는 달리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으나, 민권과 민족현실을 내용으로 표현한 점에서 커다란 공헌을 한다. 노래가사에서 우리 나라의 역사적인 두 가지 과제, 곧 반봉건성을 떨치고 인간화된 사회를 반영하는 가사와 외세로 나타난 일본에 대하여 반일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세워진 사립학교와 야학들이 국권회복의 계몽운동이 전개되면서 애국을 고취하는 가사가 크게 반영되어 있었다.

 이 시기 ‘음·악’에서 ‘음’에 해당하는 음향적 재료는 민요개작운동처럼 민중들의 역사적 정서가 반영된 민요와 새 민요가 창작되었으며, 또 하나는 서양의 온음계(장, 단음계)와 일본 쇼오카(唱歌)의 근거인 요나누키(ヨナ拔き)식 5음음계에 2박자로 만들어진다. 이로서 한국의 전통음계와 3박자의 장단감이 상실되는 점을 공개적으로 지적되지 않은 채, 가사의 뜻을 살리는 노래풍으로 서양과 일본노래가 차용된 것은 한계였다.

 한편 계몽운동노래는 학교가 보급원천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소년 학생들 속에서 널리 보급되면서, 이 시기 마지막에 白禹鏞·鄭士仁·金仁湜 등이 비로소 부각되었다. 이 흐름은 이후 李尙俊의 등장과 함께 10년대 음악사회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계몽운동노래는 크게 세분하면 배움·운동이 관련한 노래와 봉건타파 그리고 일본의 침략성을 일깨운 노래가 중심이다. ‘애국가적인 학도가·운동가·봉건타파가·친일비판과 항일가’가 이 시기를 대변하고 있으며, 그 중심은 ‘애국가’를 정점으로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김인식·정사인·이상준 등과 군악대 출신들이 시대적 요청 속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하고, 백우용이 대장으로 있었던 제실음악대는 민중들을 위한 음악회를 펼칠 수 있었다. 신청출신의 음악인들은 창극과 민족음악 형식을 창출할 수 있었고, 기생들도 자선음악회로 민중들을 지원했다. 그리고 민요의 개작운동 역시 전개되었다.

 이처럼 음악인들이 사회와 민족현실을 창출한 노래들과 민중이 서로 뗄 수 없었던 것은 애국운동과 계몽운동이 국권회복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대한제국시기의 민중운동에서 계승된 애국가의 전통이었다. 애국계몽운동으로 나타나는 노래, 곧 애국가·애국충절가·독립가·항일가·국권수호가·우국가·친일비판가·경세가·단결가·망국가·국민가·봉건타파가 등은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다) 음악운동

 제4기 한국의 전 민중들이 국권회복운동으로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자 음악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던 民樂人들은 ‘창극운동’을 아악인들은 ‘민간음악학교 설립’을 하였다. 전자는≪최병두타령≫이 정점이었다면, 후자는 ‘조양구락부’ 발족이 그것이었다. 전자가 근대음악이 구현해야 할 내용으로 인간과 민족이라는 양대 축 중에서 봉건성을 비판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창극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 기간 음악을 대표한다. 후자의 경우 ‘조선악’을 전습하고 ‘서양악’을 수용 발전시키기 위한 근대적인 음악학교 설립을 위하여 ‘조양구락부’가 1909년 12월에 발족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조선 후기부터 풀어야 할 역사적 과제가 양악의 조선음악화이었기 때문이다.482)

 ≪최병두타령≫은 1908년 11월 15일부터 약 보름간 원각사에서 공연한 창극으로서, 강원감사의 수탈에 대결하다가 살해당한 崔秉陶의 이야기를 극화시킨 작품으로, 봉건성을 비판하고 인간화 실현을 내용으로 하면서도 창극이라는 민족형식으로 현재화시킴으로써 이 시기 민족음악의 전형성을 이룬다. 민악인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한 창극운동은 1908년이 절정기로서, 1908년부터 2년간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이 가장 가열차게 전개하고 있는 국권회복운동시기와 함께 하였다. 이 작품은 이미<춘향전>과<심청전>을 창극으로 올린 바 있고 창작판소리<어사와 초동>을 지은 姜龍煥이 창극화하였다.483) 그리고 정감사를 ‘불가살이’로 풍자하는 동요, 정감사와 그 밑에 기생하는 주구층을 풍자하는 아전의 별명노래, 농부가, 정감사를 풍자하는 초동가, 교군노래, 최병도 부인의 등장가, 천쇠의 급주노래, 상두소리, 달고소리 등 민중들의 역사적인 노래로 창극화함으로써 음악으로서도 최병도의 민중적이면서 정치적 삶을 리얼하게 반영시키고 있다. 1908년 7월 말에 연습계획을 세워 진행한 창극은 倡夫들이 중심이 되어 약 두 달 넘는 연습 끝인 11월 15일에 원각사에 올렸다. 그것은 풍속개량과 연극개량 등 시대적 요구에 즉응하기 위한 비상한 노력들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민족현실을 반영한 창극에 대중들의 엄청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인직은 중도에 일본에 갔음으로 창극인들 중심으로 완성하였다.

453)≪日省錄≫, 고종 31년 6월 28일.

<草記>, 갑오 6월 28일.

≪官報≫, 광무 4년 6월 21일.
454)≪官報≫호외, 광무 9년 3월 8일.
455)布達 160호(9월 1일부)가≪官報≫, 융희 원년 11월 11일에 게재되었다.
456)포달 161호(≪官報≫, 융희 원년 11월 29일).
457)鄭尙驥,≪農圃問答≫, ‘正雅樂’.
458)故目賀田種太郞 傳記編纂會,≪男爵目賀田種太郞≫(東京:故目賀田種太郞傳記編纂會, 1938), 345∼346·533∼554쪽.
459)‘唱歌’, ‘音樂’, ‘國樂’의 구체 내용은 노동은,≪한국근대음악사≫1, 588쪽 이후 참고.
460)노동은, 위의 책, 592쪽 이후.
461)東京藝術大學 音樂取調掛 資料硏究班,≪音樂敎育成立への軌跡≫(東京:音樂之友社, 1976), 7쪽.
462)東京音樂學校內 日本敎育音樂協會篇,≪本邦音樂敎育史≫(東京:音樂敎育書出版協會, 1934), 87쪽.
463)上沼八郞,≪伊澤修二≫(東京:吉川弘文館, 1988), 213쪽.
464)故目賀田種太郞 傳記編纂會, 앞의 책, 343쪽.
465)≪官報≫, 융희 2년 8월 24일.

≪大韓每日申報≫, 1908년 7월 1·2일, 雜報.
466)≪皇室勅令≫34호, 이왕직 관제는 이후 1915년 3월의 제5호와 1916년 6월의 제1호 1920년 4월의 제3호 등 여러 번 개정을 통하여 왕가를 도태시키는 약체화를 획책하였다.
467)≪官報≫, 광무 6년 11월 1일.
468)<警視廳令>5호, 융희 2년 9월 25일.

<警視廳令>6호, 융희 2년 9월 25일.
469)경시청 제2과에서 작성한<隆熙二年 妓生及娼妓ニ關スル書類綴>警務甲種 記錄 제28호에 의한다.
470)청일전쟁 직후 일본의 창기들이 들어오면서부터 妓生은 산업의 대상이 되어갔다. 지금까지 연구는 ‘妓生’이나 ‘사당패’에 관한 접근은 주로 ‘性的 역할’을 중심으로 한 것이지, 지배체계와 일제의 性 장악 구명이 미흡했다. 李能和의≪朝鮮解語花史≫(東洋書院, 1927)도 그 한 예이다.
471)<娼妓組合組織命令ノ 件伺>, 앞의 서류철, 0079쪽.
472)조양구락부는 1911년에 조선정악전습소로 발전한다. 이 전습소는 河圭一·明完壁·咸和鎭 등과 金仁湜 등 우리 나라 아악계 대부들과 양악인이 교직원으로 있는 민간 음악학교이다. 이들이 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한 조합이 ‘茶洞組合’(후에 大正券番이었다가 朝鮮券番으로 바꾸었다)이다.
473)한편 일제는 1904년 이후 한국사회를 통제하는 각종 법적 장치를 마련하여 식민지화의 전초 단계를 획책하였다. 창작물 소통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도 보안법이나 저작권법으로 통제한다. 또, 신청활동도 ‘巫卜雜術禁止令’으로 통제하였다. 1910년 8월의<集會取締>를 제정하여 일제통치에 도전하는 안녕질서와 풍속은 물론 모든 집회가 원천 봉쇄되었다.
474)≪官報≫, 융희 2년 1월 10일.
475)≪萬歲報≫, 광무 10년 11월 5일.

≪大韓每日申報≫, 융희 원년 8월 9일.

<學部令>6호, 1909년 7월 5일,<보통학교령 시행규칙>.
476)孫仁銖,≪韓國近代敎育史≫(延世大 出版部, 1975), 40쪽.
477)朝鮮總督府,≪朝鮮の保護及倂合≫(京城:朝鮮總督府, 1918), 378쪽.
478)俵孫一,≪韓國敎育の現況≫(京城:學部, 1910), 56쪽.
479)일본음계론은 1895년에 우에하라 로쿠시로오(上原六四郞, 1848∼1913)부터 세계 제2차대전 직후 코이즈미 후미오(小泉文夫, 1927∼1983)에 이르러 획기적으로 정립하였다. 그는 일본음계를 종족음악학 방법으로 접근하여 테트라코오드식 3음렬로 체계화시켰다. 일본인의 기본감성이 되어 동요를 만드는 민요음계,<기미가요>(君が代)같은 일본 國歌의 율음계, 로쿠단(六段)같은 근대 호오가쿠(邦樂)곡을 이루는 미야코부시음계, 요나누키장음계는 근대의 대부분 창가에 이용되고, 요나누키 단음계가 엔카(演歌, 艶歌)를 형성케 하였다. 한국인들 대부분의 근대동요와 교가, 창가, 뽕짝은 일제를 경험하기 전에 없었던 일제강점하에 형성한 2박자 풍의 일본음악이다.
480)The Korea Review 6∼9월호를 인용한 김흥수,<교회와 국가관계에 대한 미북장로교 선교부와 헐버트와의 갈등>(≪한국기독교사연구≫22, 한국기독교사연구회, 1988), 22∼23쪽에서 재인용.
481)大野謙一,≪朝鮮敎育管見≫(京城:朝鮮敎育會, 1911), 31쪽.
482)이들의 후원체인 ‘정악유지회’가 대부분 친일파로 지탄을 받고 있어서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노동은,≪한국민족음악현단계≫(세광음악출판사, 1989), 152쪽.
483)朴 晃, 앞의 책, 28쪽.<최병두 타령>은 이인직이 소설≪은세계≫전반부로 개작하여 1908년에 동문사에서 발간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