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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옛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
조선시대 민화에도 사람처럼 담배 피우는 호랑이의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호랑이가 담배 피우는 시절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일상에 깊이 파고들었던 담배!
과연 담배는 어떻게 확산했고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남녀노소 모두 담배를 피웠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나라 담배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17세기 초 일본을 거쳐 조선에 전해진 담배!
포르투갈어인 타바코(Tabaco)를 일본에서 ‘다바코’라 부르던 것에서 소리를 따와, ‘담바고’로 부른 것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집니다.
‘남쪽 나라에서 전래한 풀’이라는 의미로 남초, 남쪽 나라에서 온 신비로운 풀로 여겨 남령초로도 불렸고, 연기 나는 풀이라는 의미로 연초로도 불렸는데요. 새로운 문화를 접했던 사람들의 궁금증을 다양한 이름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담배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풀인데 그 잎이 큰 것은 7~8촌쯤 된다. … 맛은 쓰고 맵다.

- 『인조실록』 인조 16년(1638) 8월 4일

담배에 대한 관심은 여러 문헌에도 생생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담배를 ‘맛이 쓰고 매운 풀’이라고 기록했고,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담배를 몸에 좋은 약초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가래와 습기를 제거하며 또한 술을 깨게 한다.

- 이수광 『지봉유설』

조선에서 담배는 이처럼, 전래 초기, 몸에 좋은 풀로 여겨져 널리 확산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요망한 풀’로 부를 정도로 중독성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손님이 왔을 때 담배를 권하는 풍습이 생길 정도로, 일상 깊이 파고들었는데요. 차를 대신한다고 해서 ‘연다‘, 술을 대신한다는 의미로 ‘연주’로도 불리며 술과 차에 버금가는 기호품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현재 조선인들 사이에는 담배가 매우 성행하여 어린이들까지도 4, 5세 때에 이미 이를 배우기 시작하며, 그래서 남녀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 헨드릭 하멜 『하멜 표류기』 1668년

17세기, 조선에서 생활했던 외국인 하멜의 눈에도 조선의 담배 풍속은 신기하게 느껴졌는데요. 아이까지 담배를 피울 정도로 담배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젊은이가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규방의 부인이나 기생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애연가를 살펴볼까요?

대표적인 인물로 정조를 꼽을 수 있는데요. 정조는 담배를 통해서만 힘을 얻었다고 말할 정도로 담배 예찬론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온갖 식물 가운데 이롭게 쓰이고 사람에게 유익한 물건으로 남령초보다 나은 것이 없도다. … 자대부(子大夫)들은 들은 것을 다하여 여러 방면으로 인용하고 곡진하게 증명하여 보아라.

- 정조 『홍재전서』「책문」 ‘남령초’

과거 시험 시제로 남령초의 유용성을 말하며, 담배에 대한 자대부의 의견을 개진하라고 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담바고가 지금 새로 나와서
귀양살이하는 자에게 제일이라네
가만히 빨아들이면 향기가 물씬하고
슬그머니 내뿜으면 실이 되어 간들간들

- 정약용 『여유당전서』

유배 길에 담배에 대한 시를 남긴 학자도 있었으니,
다산 정약용!
귀양살이 하는 사람에게 담배가 최고라고 칭송하기도 했는데요.

지금 마땅히 규정을 엄하게 세워 팔도의 담배 농사는 모두 산에 심도록 하고…

- 정약용 『다산시문집』

담배 농사가 활발해져 농작물 경작지가 줄어들자 담배 농사를 막지 않고도 농업에 피해를 주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담배가 대중화되면서 그로 인한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광해군 때는 담뱃불로 인한 화재로 80칸에 이르는 건물이 불타는 일이 있었고

빌리거나 구걸해도 한 되의 곡식이나 푼돈도 얻기 어려운데 오히려 그 절반을 나누어 담배를 사고 있다.

- 『승정원일기』 숙종 38년(1712) 1월 3일

숙종 때는 식량 대신 담배를 사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흡연으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냄새가 독해 재계(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함)하면서 신명과 통할 수 없는 것이 첫째이고 재물을 축내는 것이 둘째이며, … 상하 노소를 막론하고 해가 지고 날이 저물도록 담배 구하기에 급급하여 한시도 쉬지 않으니 이것이 셋째이다.

- 이익 『성호사설』

조선 후기의 학자 이익은 담배는 이로움보다 해로움이 더 크다고 말하며, 흡연의 여러 가지 폐해를 강조하기도 했는데요.
조선 사회 전반으로 많은 사람에게 확산했던 담배.
우려와 폐해도 있었지만, 사람들의 호기심과 관심 속에서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명품 담배가 있었다?

담배의 대중화는 다양한 사회 변화를 가져왔고 외교와 무역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됐습니다. 17세기,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에게 보내는 공식적인 물품명에 담배의 종류를 뜻하는 ‘지삼초’와 ‘궤지삼초’라는 이름이 기록돼 있습니다.
장시가 발달했던 조선 후기에는 상품작물로서의 담배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기름진 땅은 모두 담배를 심는 밭이 되고 말아서 농사가 형편없게 되었고

- 『정조실록』 정조 22년(1798) 11월 30일

18세기 말, 조선왕조실록에는 비옥한 토지가 담배밭으로 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담배 재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전국으로 확산하여 나갔습니다. 담배 농사로 큰돈을 버는 부농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명품 담배도 등장했습니다. 질이 좋은 담뱃잎을 잘 말리고 얇게 썰어 향이 풍부한 담배를 만든 것인데요. 담배의 품질도 차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죠.

천하에 대적할 짝이 없는 담배가 동방의 진안초와 삼등초라네.

- 이만영 『남령가』

조선 후기 학자 이만영이 쓴 시 남령가!
전라도 진안과 평안도 삼등 지역의 담배를 최고라고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곳은 약 300년 동안 최상의 담배 생산지로 유명세를 떨쳤습니다.

조선시대의 풍속화에서 남녀노소, 신분을 막론하고 장죽으로 담배를 피우는 모습, 본 적 있으신가요? 18세기 이후에는 신분에 따라, 담배 도구도 점점 계층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선비가 어린 시동에게 긴 장죽을 넘겨받는 그림을 통해서도 장죽은 신분을 과시하는 도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서민은 짧은 대나무 담뱃대인 곰방대를 주로 사용했고 사대부인 양반은 고급소재로 된 긴 담뱃대를 사용했는데요. 이처럼 신분에 따라 담뱃대도 계층화되었습니다.

“서민들은 두 뼘 정도 되는 단죽을 사용했는데, 두 뼘짜리는 곰방대라고 하고, 상류층은 담뱃대 길이가 길게 1미터에서 2미터까지 길이를 맞춰서 사용했고요. 금과 은이 들어가서 고가의 문양이 형성돼 있고 상류층에서는 고가의 담뱃대를 사용했습니다.”

황기조 전수교육조교 / 국가무형문화재 제65호 백동연죽장

담배의 계층화가 이루어지면서 담뱃대와 도구도 기술과 예술이 결합한 공예문화로 발전해 나간 것이죠.
무역에서 중요하게 활용되었고 상업 발달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던 담배!
이처럼,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상품작물이었습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조선 후기에 전래한 담배는 차와 술에 버금가는 기호품이었다.
2. 담배는 조선 후기 상품작물로 널리 재배되었다.
3. 신분에 따라 담배를 피우는 도구도 계층화가 이루어졌다.

해설

1. 담배의 전래와 명칭

담배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빠른 속도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담배의 명칭은 매우 많다. 조선에서는 남쪽 나라에서 전래된 풀이라는 의미로 남초(南草)ㆍ남령초(南靈草)라고 불렀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연초의 이름을 배초(排草)라고 하며, 일명 담파고(淡巴菰)라고 부른다고 하였고, 애연가였던 서호수는 『해동농서(海東農書)』에서 담배 가운데 가늘게 썬 것을 기삼이(岐三伊)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또한 시골에서는 주로 담파고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담파고는 한자 표현이 여러 개인데, 외국에서 부르던 음을 따온 글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타바코(tabaco)라는 포르투갈어를 음차하여 일본인이 담바고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조선에 전해지면서 담파고가 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 명칭은 담파고(痰破菰), 담파고(淡巴菰), 담파고(淡巴苽), 담파고(淡芭菰), 담파고(淡婆枯), 담마고(談麻古) 등으로 다양하다.

2. 담배의 빠른 확산과 다양한 인식

담배가 조선에 들어온 초기에는 약초로 인식되면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담배가 가래와 습기를 제거하고 술을 깨게 한다고 하였다.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고 부를 정도로 강한 중독성을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상에서 술과 차를 대신하여 담배를 권하는 풍습이 생길 만큼 담배는 사회 깊숙이 파고들었다.

효종대 조선에 표류했던 하멜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담배가 매우 성행하여 어린이들까지도 4, 5세 때에 이미 배우기 시작하여 남녀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기록하였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가 모두 즐기는 기호품으로 정착한 것이다. 담배는 이후 빠르게 확산되어 이미 영조 초반에 이르면 담배는 한 나라의 밭에 심지 않는 곳이 없고 한 나라의 사람 중에 먹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유행한 상태였다.

담배의 유행에 애연가들도 등장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정조이다. 정조는 과거 문제의 주제로 “온갖 식물 가운데 이롭게 쓰이고 사람에게 유익한 물건으로는 담배보다 나은 것이 없다하며, 담배를 주제로 질문에 답하라”고 주문하였다. 또한 백방으로 약을 구해 보았지만, 오직 담배에서만 효과를 보고 힘을 얻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담배가 사람에게 유익한 점으로 말하면, 더위를 당해서는 더위를 씻어 주는데 좋고, 추위를 당해서는 추위를 막아 주며, 밥을 먹은 뒤에는 음식을 소화시키고, 변을 볼 때는 악취를 쫓게 하고, 잠이 오지 않을 때는 담배를 피우면 잠이 오게 되며, 시를 짓거나 문장을 엮을 때,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때, 그리고 고요히 정좌할 때 등의 경우에도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은 점이 없다고 담배를 극찬하였다.

다산 정약용도 소문난 애연가였는데, 그는 유배 중에 남긴 시에서 담배가 귀양하는 사람에게는 제일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담배로 인해 곡물 경작지가 감소하여 담배 농사를 규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지만, 그 해결책은 남달랐다. 충청도에서는 산에 담배를 심었는데, 맛과 품질이 좋았다는 점을 근거로 모든 지역에서 담배 농사를 산에만 심게 하고, 평야에는 금지하도록 하였다. 또한 최고의 담배를 생산했던 평안도 삼등(三登)의 경우에는 평야에도 담배 농사를 허용하여, 진상품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계속해서 담배를 즐길 수 있고, 농부의 이익도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담배농사를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발전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을 구상한 것이다.

담배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지식인들도 적지 않았다. 18세기 유학자 성호 이익이 대표적이다. 그는 담배가 안으로는 정신을 해치고 밖으로는 듣고 보는 것까지 해쳐서 머리가 희게 되고 얼굴이 늙게 되며, 이가 일찍 빠지게 되고 살도 따라서 여위게 되니 사람이 빨리 늙도록 만든다고 하였다. 또한 담배에 쏟을 정신과 노력을 학문에 쏟는다면 반드시 큰 현자(賢者)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글에 힘쓴다면 문장가도 될 수 있으며, 살림을 돌본다면 부자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영조 10년(1734) 백규창은 담배가 그 맛이 매우 강렬하고 그 성질이 매우 독해며, 배고파도 먹을 수 없고 병을 치료하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풀이라고 하였다. 오히려 사람의 머리를 피곤하게 하고, 사람의 기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여러 풀 중에서도 반드시 뽑아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홍양영장 윤제만은 화약을 다루는 군병들이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면서 불을 전달하는데, 이는 폭발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빈민들이 구걸하거나 빌린 돈의 절반을 담배를 사고 있음을 지적하며 재물의 낭비가 심하다는 문제도 들었다. 담배는 화재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광해군 15년(1623) 동래부 왜관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여 80칸 건물을 모두 태우기도 하였다.

3. 담배의 주요 산지와 명품 담배

『연경』에서 이옥은 담배의 맛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평안도산 담배는 향기롭고 달며, 강원도산 담배는 평범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다. 전라도산 담배는 부드러우면서도 온화하다. 오로지 함경도산 담배만이 몹시 맛이 강해 목구멍이 마르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덮어 놓은 담뱃갑을 열었을 때 달고 향기로운 기운이 코를 찌르면 최상품이다. 매운 맛이 풍기는 것이 그 다음 품질이다. 털을 태우는 냄새가 나거나 비릿한 풀냄새가 나는 것, 그리고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쁜 품질이다. 손으로 문지르면 꿀에 담근 것처럼 진액이 배어나오고, 황금빛 가운데 붉은 색깔이 나타나는 불겅이가 최상품이다. 부드럽고도 지네 다리처럼 붉게 갈리진 반불겅이가 그 다음 품질이다. 푸르거나 검고, 노랗거나 흰 색깔을 가졌으며, 손으로 만지면 나비 날개를 만지듯 부서지는 것이 가장 나쁜 품질이다. 담배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서초(西草), 즉 평안도 지역의 담배다. 한편, 『재물보』의 저자 이만영은 진안초(鎭安草)와 삼등초(三登草)가 천하에 견줄 만한 상대가 없는 질 좋은 담배라고 하였다. 두 지역의 담배는 워낙에 맛이 좋아 “진안과 삼등의 맛좋은 담배”라는 뜻의 진삼미(鎭三味)라는 상투어까지 만들어졌다. 이 밖에도 지역명을 붙인 유명한 담배로는 평안도 성천의 성천초, 충청도 보은현 회인의 회인초, 강원도 금성의 금성초, 경상도 안동의 안동초 등이 있었다. 이러한 담배들은 전국적 명성을 얻고 명품 담배로 인정받은 것들이었다.

4. 담배로 인한 사회 변화와 다양한 담배 도구

담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사람들이 두루 즐기는 기호품이 되면서 담배 상업도 크게 발달하였다. 농부들은 조금이라도 땅이 있으면 곡식 대신 담배를 심었다. 19세기 초 전국의 장시 가운데 담배를 거래한다고 기록된 곳은 181곳이나 되었다. 서울에서는 지방의 상인이 서울로 담배를 가져와 난전(亂廛)을 열어 판매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담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던 조선에 중요한 외교와 무역이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조정에서는 청나라 황제와 신하에게 보내는 선물에 담배를 활용하였다. 일본과의 외교와 교역에도 담배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증정교린지』의 기록을 보면 일본에 가는 사신에게 항상 담배를 지급하였다.

흡연 인구가 늘어나면서 담뱃대는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서유구는 『금화경독기』에서 “전국에 걸쳐 다투어 사치하는 자들이 백통이나 오동으로 담뱃대를 만들고 금은으로 치장하여 쓸데없는데 막대한 비용을 허비한다.”고 하였다. 또한 설대는 자죽(紫竹)·반죽(斑竹)을 즐겨 썼으며, 특히 장죽에 있어서는 설대 부분을 조각하여 무늬를 새긴 각죽(刻竹)과 달군 인두로 지져서 무늬를 놓거나 그림을 그린 낙죽(烙竹)으로 치장하는 기법이 성행하였다. 이처럼 흡연을 위한 도구들은 점차 신분과 경제력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 강준만, 2011, 『담배의 사회문화사, 정부 권력과 담배 회사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인물과 사상사
  • 안대회, 2015, 『담바고 문화사』, 문학동네
  • 이옥 저, 안대회 역, 2008, 『烟經』, 휴머니스트
  • 한국고문서학회, 2006, 『조선시대 생활사3,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 역사비평사

논문

  • 김양식, 1986, 「舊韓末 煙草農業의 推移와 그 性格」, 『사학지』20
  • 이영학, 2013,『한국 근대 연초산업 연구』, 신서원
  • 이영학, 1985,「18세기 연초의 생산과 유통」, 『한국사론』13
  • 이영학, 1993,「조선후기 상품작물의 재배」, 『외대사학』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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