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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우리 문화와 예술에 관련된 수많은 주제들이 언급되고 있으나 대부분 시대별로 간략히 서술되어 그 개념과 변천 과정, 성격 등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영상 문화·예술이야기>는 한국사 속 문화·예술 분야의 주요 주제별로 그 흐름과 변천 과정, 특징과 성격 등을 전문가의 해설을 기반으로 동영상 자료로 제작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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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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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조선 사람들이 바라던 꿈 같은 인생이 담겨 있는 그림 〈평생도〉, 열 폭의 그림 중에 혼례식도 보입니다. 금실 좋은 부부를 상징하는 오리 한 쌍과 보자기에 기러기를 감싸 안고 걸어가는 기럭아범, 청사초롱을 든 네 명의 무리를 보니 아마 혼례는 저녁에 시작되나 봅니다. 사모관대를 입은 신랑은 하얀 백마를 타고 있네요.
여러분, 혹시 눈치채셨나요? 혼례를 치르러 신부가 오는 것이 아니라 신랑이 가고 있다는걸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 조선시대 혼례에서 금실을 상징하는 동물은 기러기였으나 해당 평생도의 혼례식에서는 버드나무와 오리를 통해 부부의 금실을 묘사하였습니다.)

가례 속 혼례 제도

우리는 예로부터 혼례를 인륜지대사라 하여 사람이 살아가며 하는 일 중 가장 큰 일로 여겨왔습니다. 건국 초기의 조선은 고려와 다른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내는 과정 중 하나로 혼인 의식을 제정하고 국가적으로 널리 장려하고자 했습니다.

“혼례는 혼인식을 진행하는 그 자체의 중요성도 포함하고 있겠지만 인생의 중요한 통과의례이며 이를 기점으로 개인의 삶과 가문이 전환된다는 전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김연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건국 초기의 조선은 고려와 다른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내는 과정 중 하나로 혼인 의식을 제정하고 국가적으로 널리 장려하고자 했습니다.

“조선이 도입하려 했던 혼례 양식은 주나라 대의 혼례를 송나라 때 주희가 재정리한 가례에 기록한 사례로써 이 방식은 남가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연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가례의 사례는 크게 네 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양가가 서로 혼사를 의논하는 의혼(議婚), 혼사가 채택되었다는 예를 주고받는 납채(納采), 신부의 집에 예물을 들이는 납폐(納幣)와 그리고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에 데리고 와 예식을 치르는 친영(親迎)입니다. 그러나 이 친영의 방식은 조선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지 못합니다.

조선시대 혼례 풍속

신랑이 기럭아비를 앞세우고 신붓집으로 혼례를 치르러 가는 것은 매우 오래되고 흔한 모습이었습니다.

“조선 말엽인 19세기까지도 여가에서 혼례식을 하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연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여성들은 우귀라고 하여 혼례 후에도 한동안 친정에 머물다가 시댁으로 거처를 이동했습니다.

“우귀까지 걸리는 기간은 보통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는데요.” 김연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우귀 전까지 혼인한 신랑과 신부는 각자의 집에서 지내며, 신랑이 처가에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방식으로 생활합니다. 이는 16세기 일기 자료인 유희춘의 『미암일기』와 이문건의 『묵재일기』부터 조선 후기 자료인 『노상추일기』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사례를 보입니다.

혼인한 여성이 친정집에 방문하는 근친 역시 생각보다 자유롭게 이루어졌습니다. 조선 후기의 근친은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라 해도 무방할 만큼 자율성이 컸습니다.

“보통 조선 시대에 결혼한 여성은 출가외인으로 가족이 아니라 남이나 다름없다는 말들을 떠올리실 텐데요. 그러나 조선시대의 근친은 상당히 빈번히 이루어졌습니다. 명절이나 부모의 생신, 출산이나 병의 치료, 휴양, 그리고 친정 부모의 직접적인 요청 등 이유 또한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김연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성호학통의 계승자로 정조대에 국정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던 채제공이 막내 여동생을 떠나보내면서 쓴 제문을 보면 시집간 여동생이 줄곧 친정에서 생활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네가 어쩌다 시댁에 들어가 여러 날 동안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을 때면, 온 집이 적막하여 웃음소리도 없었고, 늙으신 부모님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랐으며, 나 또한 즐거운 기분이 들지 않아 바로 사람을 시켜 돌아오라고 재촉했다.’ - 채제공, 『번암집』, 제37권, 〈이태운(李台運)에게 출가했던 막내 누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학가이며 화가였던 신사임당의 시에서도 근친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이따금 머리 들어 북촌을 바라보니 흰 구름 떠 있는 곳에 저녁 산만 푸르네.’ - 신사임당, 『대동시선(大東詩選)』 권12, 〈유대관령망친정〉

친정에 잠시 들렀다가 시댁으로 돌아가며 홀로 계실 어머니가 안타까워 지은 것이라 알려진 이 시는 사실 신사임당이 혼인한 지 거의 20년 만에 비로소 시댁으로 되돌아가며 지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사대부가에서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성립되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근접한 통혼권의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원래 출가외인은 중국 혼례 문화를 서술하는 단어로서 여성이 먼 곳으로 시집을 가기 때문에 평생 여성이 친정을 방문하는 횟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김연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그러나 조선 여성의 경우 가깝게는 같은 마을, 멀어도 같은 고을 안에서 배우자를 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친정과 왕래하는 거리상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둘째는 조선시대 결혼은 여성 개인이 아닌 가문과 가문 간의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처가 왕래에 대한 자율성이 부여된 것입니다.

근대 혼례 풍속

19세기 개항 이후 조선의 사회가 변동하며 전통적 혼례 문화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또 과부의 재가가 허용되면서 그동안 조선시대에서 같은 신분 내에서 가문과 가문의 결합으로 진행되었던 혼례에서 점차 개인이 중요시됩니다.” 김연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혼례가 개인 간의 결합으로 변화되며 상대적으로 가문 의식은 약화하였고, 결혼 후 여성 개인의 삶을 지켜주기 어려운 구조가 됩니다.

“20세기 초반부터 시집살이와 관련한 노래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김연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혼인 생활의 변화뿐 아니라 혼례를 치르는 형식과 복장, 장소 등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변화합니다.

“서양에서 도입된 공회당에서의 일요일 10시, 양복과 드레스를 입고 올리는 이 현대의 원형이 되는 신식 결혼식도 혼례 풍속의 변화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새로운 혼례 패러다임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김연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1930년대 대중 사이에서 신식 혼인의 수요가 늘어나며 전문 예식장이라는 신종 사업이 등장하고 혼례용품 대여점도 생겨납니다.

예식장이라는 신종사업은 1950년대 무렵 한국전쟁을 전후해 혼례를 올릴 마땅한 곳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확산됩니다.

이후 1980년대까지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서양식 문화의 모방 욕구와 의례의 상업화를 바탕으로 조선의 전통적인 혼례 관습이 예식장 안에 합쳐집니다. 신식 결혼식과 구식 폐백이 한 장소에서 이뤄지는 현대 결혼식은 이러한 역사 속에서 탄생한 결과물인 것입니다.

[에필로그]

혼인의 장소는 신부의 집에서 예식장으로, 신랑의 사모관대는 턱시도로, 신부의 원삼과 족두리는 웨딩드레스와 면사포로 변하였듯 혼인에 대한 개인적인 의미와 예식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앞으로도 변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전통 혼례 속에서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결혼의 의미는 서로를 공경하고 사랑하며 도리를 지켜 고락을 함께한다는 약속, 그 마땅하고 보편적인 가치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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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국사편찬위원회
제작 : 스튜디오 바카
자문 : 이일갑
검수 : 나동욱, 명재림, 서명원
수어통역 : 최황순
촬영·자료 협조: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남산골한옥마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독립기념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수원시립미술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Moffett Korea Collection

해설

조선은 제도와 법적으로는 성리학적 유교사회를 표방하는 국가였다. 법적으로 15세기부터 부녀자의 재가를 금지하였으며, 적서의 유별을 강조하여 서얼자는 관직 진출에 한계를 두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친영(親迎,시집살이)을 하도록 법령을 추가하고 부계친 중심의 사회로의이상을 실현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과연 생활·문화면에서도 이러한 제도적 원리를 따라 실행하였을까?

본 해설은 조선시대 혼례문화에 대한 4가지의 화두를 통해 그동안 제도 중심 연구에 가려있었던 실제 조선사회의 혼인문화와 생활, 이에 대한 조선사람들의 인식 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첫째, 부계친 중심적 사회에 대한 재고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일생에서 맺어지는 가족관계를 추적하다 보면 유년기에는 외가와 그 거리감이 가깝고 청장년기에는 처가와 밀접한 교류를 맺으며, 노년기에는 서가와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그 뿌리는 친가에 내리고 있되 인척과의 교유를 통해 학문을 전수 받기도 하고 정계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이는 어떠한 특수한 상황이나 특정한 인물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 조선사회의 보편적 현상으로 이해된다.

때로는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친가보다 처가와 자주 왕래하면서 학문을 익히고 처가 식구들과 교류하였으며 훨씬 많은 양의 물자를 제공받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한 사대부 개인이 일상에서 느꼈던 처가 와의 학문적, 정서적 거리는 부계친 중심의 친족들보다 결코 멀지 않았음을, 오히려 더 가까웠음을 살필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17세기 충청도에서 뿐 아니라 18세기 경상도, 19세기 전라도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바, 부계친 중심 사회의 강화에 따른 처가와의 소원함은 성립되지 않는 테제라고 할 수 있다.

외손 및 외가에 대한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조부가 바라보는 친손과 외손에 대한 애정의 정도는 비슷하였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퇴계학맥의 학통에서도 나타난다. 영남학파의 큰 줄기는 김성일-장흥효-이현일-이재-이상정-유치명-김흥락으로 이어진다. 이때 이현일은 장흥효의 외손이고 이상정은 이현일의 외손이다. 유치명 역시 이상정의 외현손이니 영남학파의 학문은 외손 전수라고 이를 수 있다.

추후에 보다 촘촘한 사례분석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실행자료를 통해 바라본 조선시대 사대부의 인척과의 물리적, 정서적, 학문적, 경제적 거리감은 상당히 가까웠으며, 밀접했고 상호적이었다. 둘째, 처첩과 적서 차별의 사회문화적 재고이다. 조선시대 법적 제도 아래서는 여성이 첩으로 들어가는 순간, 서자가 태어나는 시점부터 많은 차별이 주어질 것처럼 생각된다. 실제 서얼차대법으로서 서자가 정계에 진출하는데 한계를 두었고 정처와 첩의 지위를 구분함으로서 그 경계를 뚜렷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활문화적 관점에서 살피면 오히려 가격이 높은 첩은 그렇지 않은 집안의 정처보다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대우받으며 생활하였고, 서자와 서녀는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가족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동행하였다. 적자는 매년 서조모의 제사와 서모의 생일을 챙겼으며 정성으로 예를 다했다. 이는 실행기록을 통한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문화 현상으로서 제도적 차별이 실제 생활문화 공동체 속의 차등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 사회의 특정한 문화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원리와 실행은 구분되어서 이해할 필요성을 갖는다. 혼례문화 역시 그러하다.

셋째, 부인의 출가외인론에 대한 재고이다. 출가외인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시집간 딸은 가족이 아니라 남이나 다름없다는 말’로서 조선시대에 자주 쓰던 표현이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렇다면 과연 조선시대 여성들은 과연 결혼하면 남이었을까. 또한 출가외인이라는 가정하에 따라오는 딸들에게 주었던 애정의 정도는 아들과 달랐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오’이다.

시댁에서 해산 후 몸이 아픈 딸이 걱정되어 직접 찾아와 열흘 넘게 간호하던 아버지, 부모보다 먼저 죽은 딸을 애통해하며 구구절절히 묘지명을 작성했던 아버지의 장면은 시대를 막론하고 가족으로서, 자식으로서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위 절의 여성에 대한 인식에서 딸에게 애정을 보이고 출타하고 돌아오면 외손자녀들이 반겨주는 모습은 18세기 이후까지 나타난다. 또한 다양한 실행자료를 통해서도 조선후기에도 조선전기의 풍습을 이어 친정에서 출산과 양육을 하는 사례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사대부가에서 출가외인이 성립되기 어려웠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근접한 통혼권의 이유를 들 수 있다. 본래 출가외인은 중국 혼례문화를 서술하는 단어로서, 중국에서는 남성의 친정을 따라 먼 곳으로 시집갔기 때문에 평생에 여성이 친정을 방문하는 횟수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여성의 경우 가깝게는 같은 지역, 멀어도 도내에서 혼례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친정과 왕래하는데 거리적 불편함이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둘째, 조선시대에는 여성 개인보다는 여가라는 가격이 중요시되는 사회였기에 그에 따라 처가 왕래의 자율성이 부여되었다. 과연 여성의 근친(覲親)이 허가제인가 신고제인가에 문제에 있어서는 허락보다는 보고의 개념이 강했다고 보인다.

‘유교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철저히 남녀를 차별했다’ 이 전제는 반은 옳고 반은 그르다. 정치사회적으로 보면 여성은 정계에 진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에서 남녀는 유별하였다. 그러나 생활문화적인 관점에서 여성은 가계운영을 통해 가를 돌보고 남성의 동반자이자 조력자로서 역할하였다. 또한 현대의 관점에서는 여성이 분재를 받지 못하고, 족보에 남편의 이름이 대신 들어가며, 정계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등의 제약이 남녀차별로 받아들여지지만 당시를 살아갔던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재산을 딸에게 적게 준다고 미안해하지 않았으며, 딸은 그에 대한 불평이나 원망이 없었다. 또한 여성이 사회활동을 못한다 하여 그 권리를 침해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문제는 재고될 필요성이 있다.

넷째, 처가살이와 시집살이에 대한 표방과 실제이다.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하랴’, ‘고초당초 맵다한들 시집 보다 더할손가’ 이 두 구절은 처가살이와 시집살이에 대한 상징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본 연구는 이것이 과연 조선시대 때의 문화현상을 서술하는 구절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조선시대에는 거의 대부분(90% 이상) 여가에서 혼례를 올렸으며, 조선후기까지도 신부는 친정에서 일정기간 거주 후 시댁으로 들어가는 구조를 보인다. 여러 사례들을 토대로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시집살이 문화는 조선이 아닌, 신분제가 해방되고 교통이 발달하는 등의 근대시기에 형성된 문화현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처럼 본 시나리오에서는 법적·의례적 표방이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까지 얼마나 엄격한 잣대로 작동하였느냐의 문제의식을 토대로 실제 조선사람들의 생활문화 속 혼인의 모습을 조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도록

  • 김연수, 2018, 『전통혼례 제도사와 시집살이 문화의 탄생』, 민속원
  • 김학수 외, 2022, 『조선 명문가가 사는 법』,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이성무, 김학수 외, 2011,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
  • 임민혁(역), 2011, 『가례』, 예문서원

논문

  • 김연수, 2016, 「근대시기 혼례문화 변동 연구」, 『여성과 역사』 24, 한국여성사학회
  • 김연수, 2016, 「조선시대 혼례제도 〈친영〉의 정착과정 고찰」, 『서울민속학』 3, 서울민속학
  • 김연수, 2020, 「18세기 성호학파의 혼례관」, 『조선시대사학보』 92, 조선시대사학회
  • 김연수, 2020, 「은진송씨 송준길가를 통해 본 기호사대부의 통혼양상과 혼례문화」, 『한국계보연구』 10, 한국계보연구회
  • 김연수, 2022, 「19세기 말 혼구(婚具) 자료에 나타난 사대부 혼례문화의 특징」, 『여성과 역사』 37
  • 양미경, 2017, 「전통혼례식의 존재방식과 현재적 의미」, 『민속연구』 35,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