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제3기
근대음악사 전기 제3기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시작부터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는 직전 시기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 기간 조선은 밖으로 외세와 각종 불평등조약의 체결과 경제적 침략이 강화되어 가는 한편, 안으로는 지배층의 민중수탈이 강화된 시기이다. 국가는 갑신정변 이후 갑오개혁(1894∼95)으로, 민중들은 1894년 농민전쟁으로 근대 변혁운동이 발전하면서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을 수립하였다. 대한제국기 기간 중 1896년부터 독립협회운동의 결과 1898년의 만민공동회나 농촌사회와 도시의 유민층을 중심으로 동학당·英學黨·활빈당 등이 조직되어 반침략과 반봉건투쟁을 전개한다. 이 기간 농민들은 정부로부터 이끌어낸 갑오개혁으로 천민 음악인 신분이 철폐되고, 각종 애국가로 분수령을 이루며 노래가사 바꾸어 부르기를 시도한 민중·민족적 노래운동, 그리고 김창조의 가야금산조에 이어 백낙준의 거문고 산조 확립, 판소리와 병행한 창극의 태동과 왕립군악대가 창설되는 등 새로운 근대음악양상으로 나간다.
가) 동학과 동학농민전쟁의 음악
동학과 동학농민전쟁의 주체들은 종교적으로 동학도이고 소작으로 농사를 지은 빈농층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농민들이 동학도와 더불어 안으로 봉건성과 밖으로 외세적 국제화를 극복하려한 전쟁이다. 이 기간에 농민과 동학도들이<칼노래>와<칼춤>을 비롯하여 두레풍물과 노래, 신청출신들의 다양한 음악들이 민족음악으로 성격을 드러낸다. 1894년 벽두 수천 농민군들이 전라도 고부의 말목 장날에 모여 군수 조병갑을 징벌하기 위한 집회에서 ‘징소리와 나팔소리’를 앞세운 것도 두레풍물이었다. 신청출신들과 예인집단들이 갑오년에 앞장서서 공동체의 음악문화를 전문적으로 이끌어갔다. 孫化中 장군의 소속은 재인들로 구성한 농민군을 조직하였고 그 지도자도 세습 무당출신인 홍낙관을 내세웠으며, 金開南 장군 역시 창우와 재인 천여 명으로 조직한 부대를 이끌어간 사실에서 이들이 신분해방에 앞장섰음을 확인케 한다.434) 이들은 모두 신청출신들이어서 이미 줄타기를 비롯한 재주넘기 훈련을 마친 사람들인데다, “그 사납고 용맹함이 누구도 대항할 수 없어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할 정도로 정예부대로 활동하였다. 또 이들과 함께 농민들이 군사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지 않았지만 두레풍물을 통한 마을공동체의 집단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관군은 물론 일본군과 맞설 수 있었다. 이들 巫夫와 才人 그리고 倡優와 떠돌이 예인집단들은 다름아닌 전문음악가로서 천민이자 빈민층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전쟁은 신분해방운동이었다. “노비문서를 소각할 事”라는 집강소의 폐정 개혁을 가능케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신청출신들은 정부로 하여금 1894년 6월에 신분제도를 폐지하게 함으로써 한국음악사에서 가장 큰 분수령을 이끌어냈다. 한편 정부 관군이나 일본군은 신식 군제편성을 하고 있었으므로, 모두 양악대라는 점에서 농민군들의 민악이 민족음악으로 성격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들이 만든 민족노래<새야새야>·<개남아 개남아>·<가자서라 가자서라>·<새새 파랑새> 등이 그만큼 빛나고 있다. 관군은 洋鼓와 나팔이었고, 일본군은 군악대 2대를 동원하고 있었는데, 농민들은 ‘외국 수입품의 살인 기계’로 보고 있었다.435)
나) 왕권강화와 서양식 군악대·곡호대 강화
조선에서 극동진출을 꾀하던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함께 3국간섭을 통한 일본의 견제세력으로 부각하자 조선은 친러정권과 친일정권의 쟁투장이 되어갔다.436) 정부는 국권 강화를 목표로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 성립을 선포하고 개혁을 단행하였다. 대한국국제(1899) 공포로 외세의 경제적 침투저지와 소·중·사범학교를 세울 수 있는 신교육령 등 개혁조치를 내리고, 친위대나 시위대 등과 지방의 진위대 설치 등 군제개편을 하였다. 민중들은 그 어느 때보다 독립주권국가 확립의 열망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제3기에 군악대 개편은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1888년 기존의 중앙군의 병제를 총어영 등의 3영과 1891년 서울방비의 경리청 등 4영이 확립되었다. 이와 함께 ‘곡호병’·‘곡호대’·‘취고수’ 등의 이름으로 약 70여 명의 군악대원을 두었다. 기존의 4영에다 왕의 호위대인 용호영 등 친군5영제는 청의 영향권에서 이루어진 편제이고, 1895년에 군제개혁이 중앙과 지방에서 단행된 것은 일본군제 영향권에서 이루어졌다. 1894년 8월에 동학도 토벌을 목적으로 설치한 교도대 ‘곡호수’ 4명은 이 기간부터 일본군제의 영향권에 의한다. 1894∼1895년간의 군제개혁으로 舊營체제가 폐지되고 신군제가 들어섰다. 친위대, 교도대, 훈련대, 신설대, 왕실호위대인 시위대가 그것이다. 1895년 시위대에 처음으로 ‘侍衛隊 軍樂隊’가 설치되었다. 대내외에 왕권 보호와 그 위용을 드러낸 군악대는 기존의 곡호대와 다른 이름을 사용하여 차별성을 두었다. 그러나, 군악대란 이름이 주어졌지만 ‘內吹’ 2패(각 패당 38명) 편성이었다.437) 다만 동호수, 곡호수, 곡호병, 곡호대 등이 주로 중앙군과 지방 군부대의 악대편성 이름이었다면, ‘군악수’·‘군악병’·‘군악대’·‘군악장’ 등은 ‘왕립악대’ 이름으로 정착시켯다. 서양식 군악대 편성을 하려면 악기구입, 예산편성, 그리고 군악교사 확보가 있어야 한다. 이 과제는 1895년 이후에 해결되어 간다.438)
1900년에 전국에 걸쳐 악대가 계속 증강되고, 악대지도자로서 ‘군악교사’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를 시위대 군악대에 초청하여 군악대 강화기를 맞이하였다. 편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미 설립된 바 있는 ‘시위연대 군악대’ 51명과 ‘시위기병대 군악대’ 51명 등 102명을 중심으로 프란츠 에케르트의 군악교육이 본격화한 지 3년 후가 되는 1904년 3월 12일에 ‘군악 1개중대가 설치’되어 2개 소대로 나누어 운영하였다.439) 그리고 군악 1개중대는 관례적으로 시위 제1연대에 속하게 하였다.
다) 국가제정
대한제국의 위용을 국내외로 천명하려는 국가의지가 군악대 증강에만 있지 않았다. 그 정점이 ‘國歌’제정이었다. 대한제국은 국제외교의 의례상으로도 國歌·國旗·軍旗 등의 제정은 시급한 문제였다. 1902년 고종황제는 ‘국가제정’과 함께 ‘御旗·親王旗’ 제작을 위한 ‘旗章造成所’를 설치한다.440) 고종은 두 가지 국가 제정 지침, 곧 각국의 국가를 참조하여 새로운 국가를 만들되 ‘審定宮微’하라는 지침을 내려 시위연대 군악교사인 에케르트가 국가창작에 나선다. 그는 이미 일본국가제정에 참여한 바 있었다. 대한제국국가는 1902년 8월 15일에 공식적으로 제정되어 각 국가에게 보내졌고, 각 부대, 각급 학교에서 부르고, 악대곡으로 연주되었다. 이것이 바로<대한제국애국가>(Kaiserlich Koreanische Nationalhymne)이다. 당시 모든 나라의 ‘국가’가 ‘애국가’로 불렸으므로<대한제국애국가>는 최초의 국가이었다. “上帝여 우리 황제를 도와 천만세에 복녹이 일신케 하소서”의 가사처럼 황제 중심의 충군애국이 그 핵심이었다.
라) 군가보급의 대중화
군악대와 곡호대 그리고 나팔수 등 군제개편과 함께 ‘軍歌’ 보급도 이루어진다.441) 군가가 근대군제확립과 함께 집단적인 정신과 정서의 기틀이 확립된다는 점에서 전 시대와 다르다. 이 시기 군대는 군가가, 사회일반은 애국가가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군가는 군대 자체가 보급 진원지였다면, 애국가는 학교-교회가 중심적인 보급지였다. 두 분야 노래들은 충군애국으로서 노래운동의 성격으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대중가로 자리잡아 갔다.<대군주 폐하께서 자주독립하옵신후>·<기초로세 기초로세>등의 충군애국 노래가 1897년 친위대의 군인들이 만든 군가이다.
마) 민간 ‘애국가’ 제정운동
근대음악사 전기 제3기의 획기적인 음악사건은 ‘노래’를 ‘운동’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음악을 사회운동으로 인식한 것은 동학의<칼노래>처럼 19세기 60년대 이래 전통이다. 이 시기의 가사는 충군애국으로서 ‘애국가’와 ‘독립가’가 압도적이었다. 이 노래들이 1896년≪독립신문≫에 게재되어 대중화 된다. “부국강병 된 연후에/ 태극기를 높히 달아/日·淸국을 압제하고/오대주를 횡행하면/독립문이 빛이 나고/독립지에 꽃이 핀다” 등의 애국가가 그것이다. 학생·주사·기사·군인·예수교인 등이 애국가·독립가·애국독립가·자주독립 애국노래·독립문가·동심가·애민가·성몽가·성절송축가·대군주 폐하 탄신 경축가 등을 모두 애국가로서 보급하였다. 독립협회는 특히 ‘애국가’를 제정하여 ‘國歌’로 보급하려고 민간 애국가 제정운동을 주도하였다.442) 1896년 9월 22일자≪독립신문≫논설은 애국가 제정의 필요성을 제안한 데 이어,443) 각종 집회의 식순에 넣어 ‘애국가’를 대중화시켰다. 내용은 학부가 ‘국가제정위원회’를 조직하고, ‘율에 맞춰 작곡’하고, 외국의 음악교사를 초빙하여 각급 교원들 교육과 각급 학교에서 ‘조선백성들이 나라사랑’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가르쳐 자주독립정신과 정서를 고양시키자는 내용이다. 이 시기 각종 경축회 모임이나 만민공동회 모임, 각종 민중대회에서 애국가(애국가·경축가·독립가·찬미가·군가)가 장엄하게 불려진다.444) 이 운동은 1902년 정부로 하여금 ‘국가제정’을 이끌어내고, 독립과 민권운동을 고취시켰다.
바) 민족음악양식의 새로운 발전
제3기 기간에 민족음악양식이 새로운 발전을 가져와 음악사적으로 이 시기가 주목된다. 기악에서 ‘가야금산조’가 나왔고, 성악에서 ‘창극’이 나와, ‘산조시대’와 ‘창극시대’를 전개하였으니 이것은 새로운 한반도 전체 음악사에서 근대가 갖는 주요 음악사건이다. 모두가 사회경제적인 발전의 결과로 민중들이 음악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지고, 더욱이 한반도에 제국의 패권주의가 드세진 상황에서 나온 민족음악양식으로서 역사적이다.
가야금산조는 1890년대 전후에 金昌祖(1856∼1919)에 의하여 확립된 민족기악양식으로서 가야금 독주곡이다.445) 김창조와 더불어 한숙구와 박팔괘 그리고 심정순 등이 역시 가야금산조를 즉흥적인 산조로 만들었다. 散調는 민족음악 창작원리가 ‘氣化’에 있고, 모든 독주악기의 ‘틀’이 되어 산조시대를 이루고, 신청의 ‘一家’ 지향과 같은 음악생활에서 창작될 수 있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 이후 白樂俊에 의하여 1896년에 거문고산조가 나왔고, 박종기의 젓대(대금)산조를 비롯한 여러 악기의 산조가 하나의 원조에서 여러 유파가 발생케 함으로써 20세기 산조시대가 개막되었다.
한편 전 계층이 사회경제적 발전에 따라 도시와 농촌 그리고 상업발달지역의 조창이나 시전·장시를 중심으로 전문음악에 대한 감수성이 성숙하여 새로운 음악극 탄생을 바랐고, 각 나라의 음악이 활성화되는 데 자극되어 ‘창극’이 민족음악양식으로 나왔다. ‘唱劇’은 상설극장을 중심으로 무대예술이 부각되어 근대의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며 등장한 총체적 음악극이다.446) 한편 1902년 여름에는 일본인들이 전국의 개항지는 물론 교동에 연희장을 설치하고 매일 밤 ‘엔카(演歌)’식 ‘倭唱’과 가부키(歌舞伎) 등이 공연되고,447) 한성 내에 거주하는 청국상인들이 1904년에 청룡관에서 京劇과 연행을 운영하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448) 1899년부터는 辯士를 대동한 일본의 활동사진(영화)이 전국 순회공연을 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끄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 이후 압도하는 대중매체로 자리잡는다.449) 1903년에는 활동사진(영화) 상영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450)
이처럼 상설 실내극장에서 대중을 상대로 공연양식이 달라져 가고 있었다. 판소리를 비롯한 우리 나라 음악예술이 새롭게 변화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協律社’를 중심으로 판소리를 ‘창극화’한다. 협률사는 정부가 재정 충당을 목적으로 1902년에 설립한 관립극장이었다. 奉常寺 내에 설치한 협률사는 궁내부 내의 협률사가 관장하였다. 그 구성은 2차에 걸쳐 완료하였다.451) 이들의 주요 공연작품들은 판소리와 민요와 무용이 주축이었고, 평양날탕패 공연과 경서도 민요, 서도잡가, 기생가무, 줄타기, 재담(奇術), 잡희, 승무·검무·사자춤 등도 무대에 올려졌다. 특히 협률사에서 판소리를 창극화시킨 점이 역사적이다. 이후에 민족가극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1903년 가을의<춘향전>과 1904년 봄의<심청가>가 창극으로 나왔다.452) 초기의 창극들은 1905년의 창작창극≪최병두타령≫을 거치면서 본격화된다.
434) | 黃 玹,≪東匪紀略草藁≫. ―――,≪梧下記聞≫제2필의 97쪽과 제3필의 23쪽. ≪重犯供草-興德郡 亂民取招査案≫(규장각 도서번호 17282 13a-b)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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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 | 吳知泳,≪東學史≫, 127∼31쪽 山口常光 編著,≪陸軍軍樂史≫(東京:(有)三靑出版部, 1973), 92쪽 참고. |
436) | 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韓國軍制史≫近世朝鮮後期篇(陸軍本部, 1977), 335쪽. |
437) | 위의 책, 358쪽. |
438) | ≪增補文獻備考≫권 110, 兵考, 25a. 친러 정권이 들어서자 1896년부터 1899년까지 러시아군제로 개편되자 군악대가 설치되었다. 궁중 시위를 맡은 侍衛隊 편성을 계기로 1896년부터 매년 ‘軍樂隊費’로 4,608元씩 각각 예산편성을 하고, 군악대를 운영하였다. 1897년 3월에는 ‘露國 軍樂器 購買費’로 3,096원을 정부 예비금에서 별도로 지급한 것도 그 예로서 신호나팔과 북을 비롯한 여러 양악기들을 러시아에서 구입하였다(≪高宗實錄≫, 건양 2년 3월 18일). |
439) | <칙령 제13호>를 게재한≪官報≫, 광무 8년 3월 15일. 군악대 편제는 1등 군악장(중대장) 1명, 2등 군악장과 3등 군악장(소대장) 2명, 정교 1명, 부참교이자 1등 군악수 8명, 상등병이자 2등 군악수 12명, 병졸로서 樂手 54명, 樂工 24명 및 부참교(서기) 2명 등 104명이 군악 1개 중대 편제이었다. |
440) | ≪官報≫, 광무 6년 8월 15·20일. |
441) | ≪皇城新聞≫48호, 광무 3년 1월 23일. |
442) | 愼鏞廈,≪獨立協會硏究≫(一潮閣, 1981), 174쪽. |
443) | ≪독립신문≫1권, 73호, 건양 1년 9월 22일. |
444) | 각종 모임에 애국가 제창은 물론 장악원 합주, 삼현육각, 풍물패, 무관학교의 군가, 친위대의 곡호대 행진, 배재학당과 경성학당 및 관립·공립소학교 학도들이 교기를 앞세운 행진도 있었다. |
445) | 김창조의 출생연대가 1856년 음력 7월에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 1918년 8월 광주 북문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창조의 제자인 안기옥이 밝힌 글에서다. 김창조는 1915년경까지 가야금산조·거문고산조·가야금병창·젓대산조·단소·해금 등의 창작품을 발표하며 연주생활을 하였다. 김창조의 가야금산조 장단구성은 진양조 5장-중모리 5장-중중모리 3장-자진모리 5장으로 되어 있으며, 한 장단마다 몇 개의 장으로 나누어지는 즉흥적 ‘장별제 산조’이다. |
446) | 도시 중심의 상설시장이 상설무대화로 된 서울의 경우, 1899년 초 사설극장으로 실내무대형 연회장이 아현 지역에 만들어졌다(≪皇城新聞≫, 광무 3년 4월 3일). 1900년에 龍山舞童演戲場을 비롯하여(≪皇城新聞≫, 광무 4년 3월 6일), 관립극장인 協律社가 1902년 여름에 설립되었다(≪皇城新聞≫, 광무 6년 8월 15일 이후). |
447) | ≪皇城新聞≫, 광무 6년 8월 5일. 일본 현지에서 1880년대부터 유행한 소오시(壯士)들의 ‘신파극’인 소오시게키(壯士劇)와 ‘엔카’(演歌) 등이 유입된다. 1908년에는 서울·인천·부산 등 개항지에 ‘歌舞伎座’가 세워져 있었다(≪京城新報≫, 1908년 8월 15일). |
448) | ≪大韓每日申報≫, 1904년 11월 16일자. 제4기에 가서 1907년에 演興社를 비롯하여 光武臺와 團成社도 만들어진다. 1908년 협률사가 圓覺社로 바뀌었고, 이 밖에 長安社·音樂社·團興社 등 여러 개의 극장이 서울에 생겨났다. |
449) | 李萬烈 編,≪韓國史年表≫(역민사, 1985), 175쪽. |
450) | ≪皇城新聞≫, 광무 7년 7월 10일. |
451) | 협률사는 1차로 서울의 太醫院과 尙衣司 등에서 관기들을 선발하였고, 2차로 金昌煥·宋萬甲·李東伯·姜龍煥·廉德俊·劉公烈·許錦坡·姜小香 등 명창과 경서도명창인 朴春載·文永洙·李正和·紅桃·寶貝 등 모두 170여 명을 선발한 전국적 조직체이었다. 이 구성원들은 당대 민악계의 명인들이었다. 협률사의 구성원을 보면 정부가 처음으로 民樂人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점, 대중을 상대로 한 음악이 궁정의 雅樂이 아니라 민악이었다는 점, 그리고 신청(재인청) 출신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단체라는 점에서 음악관이 시대적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1903년 협률사 고시를 통하여 “음률하는 공인을 임의 본사에서 관활”하면서 ‘음률하는 공인’을 통제하고 있었다(≪뎨국신문≫1903년 3월 27일).협률사 소속 음악예술인들을 대표하는 김창환이나 이동백·박기홍·유성준 등은 신청출신으로 巫夫 국창이었다. |
452) | 朴 晃,≪唱劇史硏究≫(白鹿出版社, 1976), 23∼2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