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제목 | 황룡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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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皇龍寺 |
유형 | |
시대 | 삼국 시대, 통일 신라와 발해 |
관련국가 | 신라, 통일 신라 |
유의어 | 경주 황룡사지(慶州皇龍寺址) |
별칭•이칭 |
[정의]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慶州市) 구황동(九黃洞)에 건립되었던 신라의 사찰.
[내용]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 편에 의하면 553년(신라 진흥왕 14년) 2월, 진흥왕(眞興王, 540~576)이 궁성인 월성(月城) 동쪽에 있는 용궁(龍宮)의 남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고 하였는데, 그곳에 황룡이 나타나자 궁궐 대신 절을 짓고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고 한다. 황룡사는 17년간의 공사 끝에 569년(신라 진흥왕 30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는 경주(慶州)에 있던 7개의 중요 사찰 중 하나로, 사찰의 규모나 격으로 볼 때 신라 제일이었다. 신라의 역대 왕들은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100명의 고승이 모여 불법을 강론하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를 열었다.
황룡사는 장육존상(丈六尊像)과 9층 목탑으로도 유명하였다. 장육존상은 황룡사의 본존불(本尊佛)로, 역시 『삼국유사』 「탑상」 편에 설화가 전한다. 인도의 아소카 왕[阿育王]이 불상을 만들려다 실패하자 인연이 있는 나라에서 불상이 완성되기를 바라며 배에 실어 보낸 황금, 철, 모형 석가 삼존상(釋迦三尊像)으로 장육존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황룡사 9층 목탑은 643년(신라 선덕 여왕 12년)에 자장 법사(慈藏法師, 590~658)의 권유로 세우기 시작하였으며, 백제 사람 아비지(阿非知)가 공사를 담당하여 645년 완성되었다. 이 탑의 9층은 각각 주변 나라를 상징하는데, 탑을 세우면 주변 나라들이 항복하고 조공하며 또 외적의 침입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장육존상과 9층 목탑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천사옥대(天賜玉帶)와 함께 신라의 3가지 보물이라 하여 귀하게 여겨졌다. 3가지 보물 중 2개가 황룡사에 있었다는 점에서 황룡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황룡사는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의 침입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장육존상과 9층 목탑도 이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현재 황룡사지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관련자료
- ㆍ황룡사(皇龍寺)
- 사료로 보는 한국사 국문: 재상 거득공과 안길 이야기
- 주제로 보는 한국사: 2) 천자국 체제의 밑그림; 일통 의식(一統 意識)
- 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사: 진흥왕의 영토 확장
-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천문학과 수학
- ㆍ황룡사지(皇龍寺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