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제목 | 팔만대장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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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八萬大藏經 |
유형 | |
시대 | 고려 시대 |
관련국가 | 고려 |
유의어 |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
별칭•이칭 |
[정의]
13세기 전반에 새긴 대장경 목판 및 목판 인쇄물.
[내용]
판수(板數)가 8만여 장에 달하고 8만 4000번뇌(煩惱)에 대치하는 8만 4000법문(法門)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 부른다. 고려 시대에 두 번째로 판각한 대장경이라 하여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도 한다. 고려에서 처음으로 판각한 대장경은 11세기 초 현종(顯宗, 재위 1009∼1031) 대 새긴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이다. 여기에 11세기 말 의천(義天)의 주도로 판각된 속장경(續藏經)이 현종 대의 대장경 경판과 함께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으로 모두 불에 타 버렸다. 이에 당시 집권자인 최우(崔瑀) 등의 발의로 다시 판각한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대장경판을 새긴 것은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고려는 강화도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남해를 비롯한 여러 곳에 실제 판각을 담당하는 분사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237년부터 1248년경까지 약 10여 년 동안 경판을 새겼다고 한다. 대장경에 수록된 경전들은 초조대장경을 저본으로 하면서, 송(宋)과 거란[契丹]본 대장경을 비교하여 교정하였으며, 새로이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다양하게 보완하였다.
조선 초에 이르러 일본에서는 팔만대장경의 인쇄본뿐만 아니라 경판까지 보내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경판을 주지 않고 인쇄본을 통해 그 내용을 전해 주었는데, 때로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과 교환하는 형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나 조선 시기에 인쇄된 판본들 중에는 현재 일본에 소장된 경우가 많다. 대장경판은 판각 후에 강화도에 보관되었다가, 조선 초에 경상남도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로 옮겨져 지금까지 해인사에 보관되고 있다. 대장경판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었다.
[의의]
팔만대장경은 고려 시기 동아시아의 활발한 불교 교류와 고려 불교 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으며, 현재에도 여러 문화권의 대장경과 함께 불교학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목판 인쇄술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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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Ⅵ. 민족 문화의 발달
- 한국사 연대기: 팔만대장경
- ㆍ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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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역사: 가. 몽골과 40여 년 간 전쟁을 하다(A. Goryeo Battles the Mongols for Four Decades)
- ㆍ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대장각을 각판하면서 기도하며 올리는 글
-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대장경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