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찰
제목 | 원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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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願刹 |
유형 | |
시대 | 조선 시대 |
관련국가 | 조선 |
유의어 | 원당(願堂) |
별칭•이칭 |
[정의]
소원 성취를 기원하거나 사망한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목적으로 왕실에서 건립한 사찰.
[내용]
조선 시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종교, 사상계의 중심은 불교였다. 이에 따라 왕실이나 유력계층은 본인의 소원 성취나 혹은 사망한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는데, 이를 원찰이라 하였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표면적으로 내세웠으나, 불교의 종교적 역할은 사라지지 않고 왕실이나 민간에서 그대로 이어졌다. 성리학적 이념이 자리 잡은 조선 중기 이후에는 새로운 사찰의 건립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나, 이때에도 왕실의 경우에는 새로운 사찰을 건립하거나 기존 사찰을 중수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시대 원찰은 왕실에 의해서만 건립, 운영되었으며 원찰이란 용어 역시 왕실의 후원을 받는 사찰만을 지칭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 원찰은 주로 왕실 구성원의 안녕과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으며, 그에 따라 그들의 능묘와 가까운 지역인 경기 일대에 주로 세워졌다.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의 두 번째 부인인 강씨 사망 이후 그녀의 능 근처에 흥천사(興天寺)를 세워 원찰로 삼았고, 이후 수십 개의 원찰이 세워졌다.
이들 원찰은 왕실의 비호를 받아 위세를 떨쳤으며, 경제적 지원 역시 상당하였다. 조선 전기는 국왕과 왕실 구성원들 중 불교에 심취한 이가 상당히 많았다. 태조, 세종, 세조, 효령대군, 정희왕후, 인수대비, 문정왕후 등이 대표적인 불교 신자였다. 조선 전기에는 이들 원찰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 사회에서 성리학이 공고화됨에 따라 이들 왕실 원찰의 위세도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1789년(정조 13)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이듬해에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여 능침 사찰로 삼은 예에서 보듯, 왕실의 숭불 활동은 계속되었다. 특히 비빈(妃嬪)과 상궁(尙宮)이 불상 및 불화를 조성하는 데 시주하였다는 기록이 조선 말기까지 남아 있어서, 원찰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 왕실의 불교 후원은 조선 시대 내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