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시
제목 |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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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開市 |
유형 | |
시대 | 조선 시대 |
관련국가 | 조선 |
유의어 | 개시 무역(開市貿易), 개시장(開市場) |
별칭•이칭 |
[정의]
공식적으로 조선의 국경이나 허가된 장소에 개설된 외국과의 교역 시장.
[내용]
조선 시대에는 중국, 일본과 한정된 시기와 장소에서 교역이 이뤄졌다. 개시는 외교적 교류 중에 생기는 허가된 교역이나 접대를 위해 양국 간에 공적으로 허가한 시장을 말한다. 당시 중국과는 국경 지대, 일본과는 대마도를 대상으로 동래의 왜관(倭館)에서 주로 교역이 이뤄졌다.
조선 시대 가장 먼저 개설된 개시로는 중국과 교역을 통해 나타난 회동관(會同館) 개시가 있다. 조선 사행(使行)의 숙소인 북경의 회동관에서 공식 외교와 함께 나타난 정식 교역이었다. 다음으로 조선의 압록강가에서 열렸던 중강(中江) 개시가 있다. 중강 개시는 정식 외교를 통해 나타난 개시는 아니었다. 중강 개시는 1593년(선조 26)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으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군마(軍馬)를 얻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몇 차례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다가 청나라의 요청으로 복구되어 1년에 2회씩 열렸다. 또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함경도 회령과 경원에 개설되었던 북관(北關) 개시가 있다. 북관 개시는 조선 초기 여진족과 교역을 하던 장소에서 유래하였으며, 회령은 매년, 경원은 격년으로 설행(設行)되었다.
청나라와의 공식적인 외교 관문인 책문(柵門)에서도 조선 사행이 들어가고 나올 때 무역이 이루어졌다. 책문 무역은 사신단이 중국으로 들어갈 때 함께 데려간 여분의 말과, 돌아올 때 의주부가 물품 운송을 고려하여 책문에 들여보낸 빈 말을 이용하여 시작된 비공식 무역이었으므로 본래 후시(後市)로 불렸다. 그러나 이후 조선 정부가 상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교역을 공인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일본과의 교역은 임진왜란 때 끊어졌다가 1601년(선조 34) 동래부에 왜관을 다시 설치하여 제한된 시기와 장소에서 개시가 허용되었다. 왜관의 여러 건물 중 무역을 진행하도록 건물이 지정되었으며, 한 달에 2, 3회부터 많으면 6회까지 개시가 열렸다.
개시를 통한 교역량은 크지 않았다. 공식적인 교역으로 제한 요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비공식적인 후시가 개설되면서 교역량은 증가하였다. 따라서 개시는 비록 표면적인 규모는 후시보다 작지만 후시를 가능하게 해 주었던 공적인 교역으로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 관련자료
- ㆍ개시(開巿)
- 사료로 보는 한국사 국문: 장시의 발달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개시와 후시
- 주제로 보는 한국사: 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대외 무역의 발달
- ㆍ개시장(開市場)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외국 상인의 진출에 대한 서울 상인들의 대응
- 주제로 보는 한국사: 다. 서울 도로의 정비와 건설
- ㆍ중강개시(中江開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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