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창
제목 | 사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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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社倉 |
유형 | |
시대 | 조선 시대 |
관련국가 | 조선 |
유의어 | 사창법(社倉法), 사창 제도(社倉制度) |
별칭•이칭 |
[정의]
조선 시대 향촌에서 봄이나 흉년이 든 해에 곡식을 대여해 주던 기관.
[내용]
사창은 의창(義倉), 상평창(常平倉)과 함께 곡식이 부족한 백성들에게 재생산 혹은 구호를 목적으로 곡물을 대여해 주는 구호 제도이다. 그러나 사창은 받아들일 때에 이식(利息)을 받는다는 점에서 다른 구호 제도와 차이를 보인다. 사창 제도는 중국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주희(朱熹, 1130~1200)가 남송(南宋) 대에 지방 행정 단위인 사(社)에서 이 제도를 시행했다. 조선에서는 중국의 ‘사’에 해당하는 면(面)을 단위로 창고를 세우고 해당 지역민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다. 따라서 비슷한 기능을 담당했던 상평제(常平制)가 현(縣)을 단위로 실시되었던 것과 비교해 적용 범위가 비교적 적은 것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창은 관에서 운영하기도 했지만 민간이 운영 주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사창제는 물가의 조절에 힘썼던 상평제와 달리 진휼(賑恤)에 중점을 두고 시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초기부터 곡식이 부족한 봄이나 흉년이 심하게 든 해에 곡식을 빌려 주는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이것이 의창(義倉)이다. 의창은 관의 곡식을 무이자로 민간에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잦은 흉년에 의창으로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국가가 아닌 지방을 중심으로 자치적인 성격을 지닌 사창을 설치하였다. 사창 제도는 1444년(세종 26) 처음 논의되었으며 1451년(문종 1) 시험적으로 경상도 지역에서 설치되었고 점차 확대되었다. 이후 1461년(세조 7) 사창제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사창제를 통해 원곡과 거두는 이식이 점차 고리대의 문제를 야기하게 되자 1470년(성종 1) 혁파되었다.
그러나 극심한 기근이 이어졌던 17세기 중엽 사창제의 부활이 다시 논의되었다. 1684년(숙종 10) 이단하(李端夏, 1625~1689)가 「사창절목(社倉節目)」을 제정하여 사창을 다시 제도적으로 시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창제는 공식적으로 부활되지 못했고 간헐적으로 지방에서 시행되다가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마침내 다시 부활되었다.
▶ 관련자료
- ㆍ사창 제도(社倉制度)
-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사회 정책과 사회 제도
- ㆍ사창(社倉)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굶주린 사람을 구휼하는 법
- ㆍ사창법(社倉法)
- 사료로 보는 한국사 국문: 해주 향약
- ㆍ사창제(社倉制)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환곡제의 폐단
- 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사: 내정 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