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륭원
제목 | 현륭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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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顯隆園 |
유형 | |
시대 | 조선 시대 |
관련국가 | 조선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묘소.
[내용]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즉위 초부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장할 뜻이 있었는데, 1789년(정조 13) 7월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양주 배봉산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역인 영우원이 너무 비좁아 서둘러 이를 옮겨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이를 즉각 공론화시켰다. 그 결과 사도세자의 묘소로 수원부 읍치가 위치하고 있는 용복면(龍伏面) 화산(花山)이 최종 낙점되었다. 이곳은 일찍이 효종의 능묘 후보지로 지목될 만큼 최고 길지(吉地)의 명당으로 꼽혀 왔다. 이 해 8월 묘소를 옮기는 천릉(遷陵) 작업과 동시에 수원부를 팔달산 기슭 신기리(新機里) 일대로 옮기는 대대적인 신도시 이전 작업이 병행되었다. 현륭원 역사와 더불어 왕의 능행(陵幸)에 대비한 수원 행궁을 비롯하여 과천 행궁 설치, 역참(驛站)의 정비, 도로 보수와 교량의 영건 작업도 서둘러 진행하였다.
현륭원 조성을 위하여 민가의 철거 작업이 시작되었고 정조가 친히 공역을 감독하는 가운데 10월에 사도세자의 영구(靈柩)가 영우원에서 현륭원까지 무사히 안장되었다. 이로부터 구(舊) 읍민의 이사와 신(新) 읍치 건설도 한층 가속화되었다. 천릉에 앞서 8월 9일 새롭게 조성된 묘역의 이름을 ‘현륭(顯隆)’이라 정했는데, 이는 ‘현부(顯父)의 은혜에 융성하게 보답한다.’는 의미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절실하면서도 지극한 효심을 표현한 것이다.
정조는 현륭원 조성과 수원 신도시 건설⋅화성 축조⋅현륭원 행차 등의 과정을 통해 수원부와 인근 읍민들에게 행정적으로 여러 가지 대민(對民) 특별 조처를 자주 시행하였다. 정조는 선친의 묘소를 이장한 수원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1789년(정조 13) 천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정조가 사망하는 1800년(정조 24) 1월까지 모두 13차에 걸쳐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잦은 능행을 시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원부를 비롯한 광주⋅과천⋅안산⋅시흥 등 인근 읍민들에게 문⋅무과 별시, 환곡과 군량의 감면, 부역의 면제, 연로한 자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품계를 올려 주는 등 각종 특혜를 수시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