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조 신원 운동
제목 | 교조 신원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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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敎祖伸寃運動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조선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죄명을 벗기고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전개한 운동.
[내용]
조선 정부는 1864년(고종 1)에 동학을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으로 처형하고 동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동학 지도층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을 중심으로 교단을 재건하고 교세를 확장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동학을 합법화하기 위한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교조 신원 운동은 총 4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1871년(고종 8) 3월 11일에 이필재가 동학 조직을 이용해서 교조 신원을 요구하며 경상도 영해부(寧海府) 관아를 습격한 사건으로 ‘이필재의 난’이라고도 일컫는다. 이 사건은 정부군에 의해서 5일 만인 3월 15일에 진압되었다.
1892년 10월과 11월에 동학교단 지도 세력들이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각각 집회를 개최해서 교조 신원과 탐관오리의 수탈 금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충청 감사 조병식과 전라 감사 이경직에게 제출한 사건이다. 조병식과 이경직은 탐관오리의 수탈 금지와 교조 신원은 조정의 일이라는 답변서를 보냈으며, 동학교단은 이를 계기로 조정을 상대로 교조 신원 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1893년 2월 11~14일 동학교단에서 파견한 박광호를 비롯한 40여 명의 교도들이 교조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정부에 제출하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밤낮으로 호소한 사건으로, 서울 복합 상소 운동으로 일컫기도 한다. 조선 정부는 상소 주동자 박광호 체포를 명령하고 동학교도의 상경을 막지 못한 전라 감사 이경직과 한성부윤 신정희를 파면하는 등 동학을 강경하게 탄압하였다.
서울 복합 상소 운동이 실패하자,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을 비롯한 동학 지도층은 1893년 3월에 충청도 보은에서 집회를 개최했다. 전국에서 2만여 명의 교도가 모인 보은 집회에서 동학교단은 교조 신원을 주장하는 한편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정치적 기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정부는 어윤중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임명하고 보은으로 급파해서 동학지도부에 대한 회유와 설득을 진행했다. 그 결과 보은 집회는 4월 3일에 해산되었다.
[의의]
종교적 성격의 교조 신원 운동은 반외세, 반봉건의 정치적 성향으로 확대되면서 농민층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으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