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무 공원
제목 | 연무 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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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鍊武公院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조선, 미국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1888년(고종 25)에 설치한 서구식 군인 교육 기관.
[내용]
조선 정부가 서구식 군사 훈련과 사관 양성을 목적으로 미국 정부에 군사 교관 파견을 의뢰한 해는 1883년(고종 20)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조선 군대의 서구식 훈련은 청국 군사 교관과 일본 군사 교관이 맡았다. 그런데 갑신정변으로 체결된 톈진 조약에 의해 조선 정부는 청국인과 일본인을 더 이상 군사 교관으로 고용할 수 없게 되자, 미국 정부에 육군 군사 교관 파견을 적극적으로 요청하였다. 이에 미국 정부는 군사 교관 파견을 약속했고, 그에 맞추어 조선 정부는 1888년 2월에 연무 공원을 설치했다. 1888년 4월에 도착한 미국 군사 교관단은 수석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 茶伊), 조교관 커민즈(E. H. Cummins), 리(J. G. Lee)와 주일 미국 영사관 소속의 닌스테드(F. J. H. Nienstead)로 구성되었다.
연무 공원의 입학 자격은 전⋅현직 장신(將臣)과 아장(亞將)의 자제와 친척 중 16세 이상 27세 이하의 남자로 제한되었다. 조선 정부는 민영익, 한규설, 이종건을 연무 공원 판리사무(辦理事務)로 임명하고, 연무 공원 직제절목(織制節目)을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인 수석 교관 다이를 병조참판으로 임명하는 등 연무 공원의 운영을 위한 제반 사항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연무 공원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과거에 합격해야만 무관이 될 수 있었으며, 양반 출신의 학생들은 엄격한 군사 교육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의 만성적인 재정난으로 미국인 교관들의 봉급을 제때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자, 조선 정부는 두 명의 군사 교관을 해고했다. 그런데 조선 정부는 남은 두 명의 군사 교관에게 연무 공원 교육뿐만 아니라 서울 궁성 수비대의 훈련 업무까지 부과하여 연무 공원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었다. 1894년 7월에는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이 조선군을 무장 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연무 공원의 무기를 약탈함으로써 연무 공원은 그 기능을 상실했다. 결국 그해 12월 군무아문(軍務衙門)의 개편 과정에서 연무 공원은 사실상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