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성회
제목 | 협성회 |
---|---|
한자명 | 協成會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조선~대한제국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1896년(고종 33) 배재 학당(培材學堂)을 중심으로 결성된 학생 운동 단체.
[내용]
1895년 12월에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의 초청으로 배재 학당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이때 서재필은 학생들에게 토론회를 열도록 권하였고, 이에 호응한 13명의 학생이 1896년 11월 30일 첫 모임을 가지면서 협성회가 조직되었다. 초기의 협성회는 학생들이 중심이었지만, 차츰 일반 회원의 가입이 늘어 1898년 2월 19일에는 회원 수가 약 300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지방에서도 협성회 모임이 결성되었다.
협성회의 활동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초기는 1896년 11월 30일부터 〈협성회 회보(協成會會報)〉가 발간되기 전인 1897년 12월 31일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토론회 개최였다. 이 시기 협성회는 총 33회의 토론회를 열었는데, 처음에는 주로 교육 문제를 다루다가 점차 사회, 정치 문제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다음으로 중기는 〈협성회 회보〉가 발간된 1898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문〉이 발간되기 전인 1898년 4월 2일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 협성회는 토론회를 통한 활동과 주장을 일반인에게 널리 알릴 목적으로 주간지 〈협성회 회보〉를 발간하였다. 〈협성회 회보〉는 교육은 물론이고 사회, 정치, 외교 등의 문제를 폭넓게 다루었으며, 독립 협회나 아펜젤러를 비롯한 선교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말기는 〈매일신문〉이 발행되는 1898년 4월 9일부터 신문이 종간되는 1899년 4월 3일까지의 기간이다. 〈협성회 회보〉를 대신하여 창간된 〈매일신문〉은 한국 최초의 일간지로 총 278호가 발간되었다. 신문의 논조는 대체로 열강의 주권 침탈 비판과 국권 수호, 민중 계몽과 민권 확장 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또, 이 시기 협성회는 외세의 부당한 내정 간섭을 비난하고 정부나 대신들의 잘못을 비판하였으며, 만민 공동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토론회가 임원들의 갈등으로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1898년 8월 이후에는 전혀 열리지 않았다.
▶ 관련자료
- ㆍ협성회(協成會)
- 주제로 보는 한국사: 다. 대한제국의 국기와 국가 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