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 무관 학교
제목 | 신흥 무관 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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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新興武官學校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중국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1911년 만주 유하현(柳河縣)에서 조직되어 1920년까지 운영된 항일독립군 양성 기관.
[내용]
1909년 무렵 항일 투쟁 노선을 견지했던 신민회(新民會) 간부들은 양기탁(梁起鐸, 1871~1938) 등을 중심으로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군관 학교 설치를 논의했다. 1910년 중순에 신민회 간부인 이동녕(李東寧, 1869~1940)과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등은 남만주 지역을 답사하여 기지 후보지를 물색했다. 기지 건설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명문거족이었던 이회영의 형 이석영은 재산을 처분하여 거금을 쾌척했고, 이회영의 6형제 모두가 1910년 말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회영, 이시영, 이상룡 등 신민회 회원들은 1911년 유하현 삼원포(三源浦) 추가가(鄒家街)에 자치 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결성하고, 군인 양성을 위한 신흥 강습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1911~1912년 연이은 흉년으로 자금 모금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경학사의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후 길림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 합니하(哈泥河)로 본부를 옮겨 새로운 자치 기구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경학사를 대신했다. 부민단은 6천여 명의 한인 마을을 관장하면서 만주의 중국 정부와 교섭을 벌였다.
신흥 강습소는 1911년 말 제1회 특기생 40여 명을 배출했다. 그러나 추가가에서는 시설이 열악하여 제대로 된 교육과 군사 훈련을 할 수 없었다. 이회영은 중국 북경 정부의 위안스카이(袁世凱) 및 동북3성을 지배하던 장쭤린(張作霖) 정부 당국과 교섭하여 토지 매입에 대한 허가를 얻어내고, 1912년 7월 합니하에 새 교사를 신축했다. 병영과 학년별 강당, 교무실, 취사장, 내무반이 마련되어 본격적인 군사 훈련이 가능해졌다. 교사 신축은 이석영 등의 재력으로 가능했지만, 운영비를 충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학교 당국이 산에 밭을 일구고 학생들은 노동하는 둔전병 제도를 도입해 학교 재정을 충당해 갔다. 주변 동포들의 적극적인 후원도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이전의 추가가 학교에서는 소학교 과정을 가르쳤고, 합니하에서는 중학교 과정과 군사과를 두어 군인을 양성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합니하 학교를 ‘신흥 중학교’ 또는 ‘신흥 무관 학교’로 부르거나 인식하기도 했다. 공식 명칭은 어디까지나 ‘신흥 강습소’였다. 당시 교장은 이철영과 이동녕, 이상룡 등이, 교감은 김달, 윤기섭 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관 학교였던 탓에 교육 내용은 군사 교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때 사용된 병서들은 일본군과 중국군의 병서를 바탕으로 우리 식에 맞게 고쳐 만든 것이었다. 군사 교육뿐만 아니라 역사와 국어, 지리 교육을 강조하여 민족정신 함양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밖에 인간 덕성 교육과 경제 및 교육, 과학 교육 등도 이뤄졌다. 또 학생들은 무용(武勇)을 자랑하는 창가를 즐겨 불렀다.
졸업생들은 1913년 5월 신흥교우단(1915년 4월 이후 신흥학우단)을 조직하고, 『신흥학우보』를 발행하며 신흥 학교의 활동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다. 또 이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장차 독립 전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신흥 학교 외에 제2의 군영인 백서농장(白西農場)을 1915년 봄에 마련하여 정예 훈련을 실시했다. 처음 입영한 인원은 385명이었고, 농장주는 김동삼이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 3월 13일 부민단은 주변 단체를 통합해 한족회(韓族會)로 확대⋅개편되었다. 또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면서 신흥 학교를 찾는 한인들이 급증하자, 1919년 5월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로 학교를 이전⋅개교했다. 기존의 합니하 학교는 분교가 되었다. 고산자 학교의 교장은 이세영(이천민), 교감은 윤기섭, 교관에는 성준용, 원병상, 이범석 등이 있었다. 고산자로 이전하면서 교육 과정도 개편되어, 장교반(6개월)⋅하사관반(3개월)⋅특별훈련반(1개월) 과정으로 나누어 군사 훈련이 실시되었다. 학교가 번창하자 중국 당국의 탄압이 심해졌다. 1920년 1월 일본의 사주를 받은 장쭤린 동북3성 군벌의 중국 관헌은 한족회의 해산을 명령했다. 5월부터는 일제와 합동수색대를 편성해 독립운동 근거지를 습격하고 민족운동가들을 체포⋅살해하기 시작했다. 이를 피해 신흥 무관 학교는 1920년 7월경 안도현(安圖縣)으로 이동했지만, 끝내 8월경 폐교되었다.
폐교가 되었지만 1911년부터 1920년까지 배출된 수많은 졸업생들은 만주와 중국에서의 항일 독립 투쟁에 투신했다. 만주에서 활동한 졸업생들은 주로 서로 군정서와 북로 군정서에 가담했고, 이들이 훈련시킨 독립군들과 함께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의 주역이 되었다. 이후 이들은 만주 지역의 대한 통의부,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 주요 무장 독립운동 단체에서도 활동했다. 1919년 11월 결성된 의열단 역시 단장 김원봉을 비롯하여 신흥 학교 출신들이 주도한 단체다. 1930년대 이후 임시 정부 산하의 광복군에도 많은 졸업생들이 가담하였다.
▶ 관련자료
- ㆍ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신민회 결성 취지문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의열단과 조선 혁명 선언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독립군 아내들의 고통
- 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사: 신민회의 활동
- 한국사 연대기: 신흥 무관 학교(신흥 강습소)
- ㆍ신흥 강습소(新興講習所)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무정부주의 운동-허무당 선언서
- 사료로 보는 한국사 국문: 독립군 아내들의 고통
- ㆍ신흥 학교(新興學校)
- 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사: 신민회의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