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농민 총동맹
제목 | 조선 농민 총동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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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朝鮮農民總同盟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1927년 농민 운동의 전국적 지도 기관으로 조직된 단체.
[내용]
1920년대 들어 소농민과 소작인이 다수였던 농민들이 소작인 조합 등을 조직하여 생존권 투쟁을 전개하였다. 농민 운동의 성장과 함께 통일적인 조직의 결성이 추진되었고,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조건과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자와 농민을 단일한 조직으로 묶어 운동을 전개하는 것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조선 노농 총동맹은 1925년 11월 제6차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의 분리를 결정하였지만, 일제가 분리를 위한 전국대회를 허가하지 않아 바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결국 조선 노농 총동맹은 1927년 9월 서명대회를 통해 조선 농민 총동맹과 조선 노동 총동맹의 분리를 선언하였다.
조선 농민 총동맹은 농민 운동의 전국적 지도 단체로 설립되었고, 산하에 200여 개의 가맹 단체를 거느렸다. 설립 당시 조선 농민 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은 인동철(印東哲)이 맡았고, 중앙집행위원은 김복수(金福洙), 김익두(金益斗), 서태석(徐邰晳), 송영섭(宋寧燮), 안준(安埈), 정학원(鄭鶴源), 천두상(千斗上) 등 20명이 선출되었다. 조선 농민 총동맹 설립 이후 전국 각지에 농민 조합이 조직되고 소작 쟁의가 활발히 전개되며 일제의 농촌 지배에 대항하였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자 농촌에서는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농가들이 큰 타격을 받았고, 지주들의 착취가 강화되면서 소작농의 몰락과 자연 발생적인 소작 쟁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한편 이를 혁명적 시기로 인식한 공산주의 세력의 혁명적 농민 운동이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이에 대해 일제는 혁명적 농노조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철저히 탄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농촌 사회 안정을 위한 농촌 진흥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조선 농민 총동맹은 일제의 탄압을 지속적으로 받는 동시에 공산주의 세력의 혁명적 농민 운동으로 이행과 조선 농민 총동맹 해소 운동이라는 공격에 시달렸다. 그 결과 조선 농민 총동맹과 산하 농민 조직과의 조직적 연대가 무너지면서 점차 그 영향력을 상실해 갔다. 일제는 농촌 진흥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1933년 기존 농민 관련 단체들을 관제 농민 기구인 ‘조선 농회(朝鮮農會)’로 강제 통합하였다. 이렇게 일제와 공산주의 세력 양쪽의 공격에 처하면서 조선 농민 총동맹은 유명무실한 단체가 되었고, 결국 1935년 6월 조선 농민 총동맹은 해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