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 인민 대표 대회
제목 | 극동 인민 대표 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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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極東人民代表大會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러시아 |
유의어 | 극동 피압박 민족 대회(極東被壓迫民族大會), 극동 피압박 인민 대회(極東被壓迫人民大會), 극동 민족 대회(極東民族大會), 극동 무산자 대회(極東無産者大會) |
별칭•이칭 |
[정의]
1922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주도로 열린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 단체의 연석회의.
[내용]
극동 인민 대표 대회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워싱턴 회의에 대응하여 개최된 회의였다. 코민테른집행위원회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 단체 대표자들을 모스크바로 불러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약소민족은 단결하라”는 표어를 내걸고,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대표자들의 도착이 늦어지면서 대회를 연기하여 모스크바에서 개최하였다.
극동 인민 대표 대회에는 9개국이 참가했으며, 참가자는 144명이었다. 이 중에 한국인은 52명으로 가장 많은 수가 참석하였으며, 의장단에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이 선출되었다. 한국인 참석자가 많았던 것은 당시 소련과 코민테른이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해 적극적 지원을 표명하였기 때문에, 한국 독립운동에 이들의 원조를 받기 위한 기대에서였다. 특히 파리 강화 회의와 워싱턴 회의에서 보인 서구 열강의 일본 식민 통치 묵인과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에 실망한 많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념을 떠나 이 회의에 상당수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 문제에 대해서 워싱턴 회의와는 다른 결론이 도출되었다. 극동 인민 대표 대회는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가 체결한 ‘4국 조약’을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한 ‘흡혈귀 동맹’으로 규탄하며,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한국은 농업국으로 농민 가운데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자를 움직여 민족 운동을 일으킬 것과 둘째,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하며 이를 개량하고 촉진시킬 것을 결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