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독립 동맹
제목 | 조선 독립 동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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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朝鮮獨立同盟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중국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1942년 중국 화베이(華北) 지역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이자 해방 직후 북한에서 결성된 조선 신민당의 모체가 되는 정치 단체.
[내용]
중일 전쟁 이후 중국 공산당 팔로군 지구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1941년 1월 산시성(山西省) 타이항 산(太行山)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이하 연합회)를 결성했다. 한편 1938년 10월 창설되어 중국 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하던 조선 의용대의 주력 부대는 항일 무력 투쟁을 위해 1941년 6월 타이항 산의 팔로군 지구로 이동해 왔다. 이들 두 세력이 모여 1941년 7월 7일 조선 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했다. 지대장은 박효삼(朴孝三)이었다. 이때부터 화북지대는 연합회의 정치적 지도를 받는 산하 단체로서의 성격을 띠었다. 1942년 5월 충칭(重慶)에 있던 조선 의용대 본부가 임시 정부의 광복군으로 편입되자, 7월 연합회는 ‘조선 독립 동맹’(이하 ‘독립 동맹’)으로, 화북지대는 ‘조선 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했다. 이때 독립 동맹은 중앙 집행 위원으로 김두봉(金枓奉), 무정(武丁), 최창익(崔昌益), 박효삼, 이유민(李維民), 김창만(金昌萬), 김학무(金學武) 등 11명을 선출했다. 집행부서로 서기부와 경제위원회, 공작위원회 등을 두었다. 조선 의용군은 독립 동맹 산하 군사 단체가 되었다.
독립 동맹은 강령에서 일제의 조선 지배를 전복하고 조선 민주 공화국을 건립할 목적을 표명했다. 그리고 보통 선거에 의한 민주 정권 건립, 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 등의 자유 확보, 인권 존중의 사회 제도 실현, 남녀 평등 실현, 일제와 친일 대기업의 자산 및 토지 몰수, 8시간 노동제, 누진세 실시, 의무교육제 등을 목표로 규정했다. 또 독립 동맹의 성격을 조선 독립을 쟁취하려는 지방 단체의 하나로 규정하고, 대중적 기반을 모아 중국 내 조선인 혁명 단체를 통일하는 데 목적을 둔 화베이 지역 통일 전선임을 명시했다.
독립 동맹은 연합회 시기부터 화베이 각지에 간부를 파견해 지회(독립 동맹 분맹)를 결성했다. 또한 무장 투쟁과 간부 양성을 위해 1942년 11월 타이항 산에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교장 무정)를 세웠다. 이런 조직을 바탕으로 독립 동맹과 조선 의용군은 항일 선전 활동과 일본군 점령 지구에서의 첩보 활동을 펼쳤고, 화베이의 조선인을 조직해 무장 투쟁에 나서게 했다. 또 공산당 팔로군의 지도를 받으며 직접 항일 전투를 전개하기도 했다.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내의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 동맹 등과 접촉해 전 민족 항일 연대 투쟁을 형성하고자 했다. 1943년 말에는 중국 공산당의 결정에 따라 독립 동맹 중앙이 옌안(延安)으로 이동했고, 1945년 2월에는 옌안에서 조선 군사 정치 학교(교장 김두봉)를 개교했다. 독립 동맹원과 조선 의용군 대원들은 여기에서 항일 간부 양성 교육을 받았다.
해방 후 독립 동맹 주요 간부들은 38선 이북으로 귀국했다. 무정, 김창만, 박일우, 허정숙 등은 조선 공산당에 가입했고, 김두봉과 최창익, 한빈 등 나머지 주요 간부들은 독립 동맹의 명칭을 유지하다가 1946년 2월 조선 신민당으로 개편했다. 강령은 독립 동맹의 것을 계승했다. 김두봉은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는 등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 관련자료
- ㆍ조선 독립 동맹(朝鮮獨立同盟)
- 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사: 한국 광복군의 활동
- 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사: 독립 지사들의 귀국
-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국내외 항일 민족 운동
-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광복 직후의 국내 정세
- ㆍ화북 조선 독립 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대한민국 건국 강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