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사건
제목 | 시안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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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西安事件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중국 |
유의어 | 서안 사건(西安事件), 서안 사변(西安事變), 시안 사변(西安事變) |
별칭•이칭 |
[정의]
1936년 동북군벌 장쉐량(張學良, 1898~2001)과 양후청(楊虎城, 1893~1949)이 항일 항전을 주장하며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蔣介石, 1887~1975)를 구금한 사건.
[내용]
시안 사건은 1936년 12월 12일 중국 공산당 토벌 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西安)에 온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를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과 서북군 사령관 양후청이 감금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장제스는 먼저 내부를 안정한 후 외부를 물리친다는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 정책을 고수하며 항일 투쟁보다는 공산당 섬멸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의해 만주를 침략당한 상황에서 중국 민중들은 항일 투쟁을 회피하는 장제스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이러한 민중의 불만을 이용하여 항일 연합 전선을 주장하며 국민당을 압박하였다.
장제스가 공산당 섬멸을 위해 시안에 배치한 장쉐량은 반공 투쟁보다는 항일 투쟁을 지지했다. 동북군벌인 장쉐량은 그의 아버지인 장쭤린(張作林)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暴死)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만주 점령으로 그의 근거지인 동북3성에서 쫓겨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항일 투쟁이 절실하였다. 장쉐량의 부하들은 공공연히 장제스의 반공 투쟁에 반발하여 국공 합작과 적극적 항일 투쟁을 주장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장쉐량은 1936년 4월 상순 중국 공산당 대표인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비밀리에 만나 항일 투쟁 노선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장쉐량의 동북군과 중국 공산당은 비밀리에 상호 협정을 맺고 서로 충돌을 자제하였다. 이렇게 장쉐량이 공산당 토벌에 소극적이자,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1936년 12월 7일 직접 시안으로 왔다. 이런 상황에서 장제스가 공산당 토벌을 강요하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장쉐량이 양후청과 함께 장제스를 감금하면서 내전 중지와 항일 전쟁을 호소했다.
사건이 발생하자 12월 17일 중국 공산당 대표 저우언라이 등이 시안에 도착했고, 12월 22일에는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과 처남 쑹쯔원(宋子文)이 도착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 내 보수파와 반장제스파들은 장제스의 안위와 상관없이 중국 국민당 대군을 시안으로 진격시키려 했다. 장쉐량과 공산당은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전쟁을 함께 전개하기 위해서는 장제스의 협조가 절실했기 때문에 협상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24일 삼자간 협상을 통해 최종 합의에 도달했고, 25일 장제스는 장쉐량과 함께 난징으로 돌아갔다. 평화적으로 합의된 내용에는 내전 정지와 일치항일, 남경 국민당 정부의 개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과의 연합을 통해 적극적인 항일을 선언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실현되는 제2차 국공 합작의 출발점이 되었다. 장제스는 감금된 상황에서의 협상이었지만 더 이상 공산당 토벌이 불가능하고 일치항일이 돌이킬 수 없는 중국민의 여망이자 대세임을 확인하자 합의 결과를 준수했다. 그렇지만 시안 사건을 주도한 장쉐량은 장제스에 의해 평생 감금 생활을 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