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증주의 사학
제목 | 실증주의 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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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實證主義史學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
유의어 | 실증사학(實證史學), 문헌 고증 사학(文獻考證史學) |
별칭•이칭 |
[정의]
사료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철저히 배제하고 치밀한 문헌 고증을 통해 한국사를 복원하는 데 주력한 역사학.
[내용]
1920~1930년대 도쿄 제국 대학이나 와세다 대학, 경성 제국 대학 등에서 일본 역사학계의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한국인 역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한 한국 근대 역사학의 한 흐름이다. 이병도(李丙燾), 이홍직(李弘稙), 김상기(金庠基), 이상백(李相佰), 신석호(申奭鎬), 유홍렬(柳洪烈), 이선근(李瑄根)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국내에 경성 제대 외에는 사학을 제대로 훈련받을 곳이 없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일본의 여러 대학이나 경성 제대의 학풍, 곧 ‘관학(官學) 아카데미즘’을 수용했다. 이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던 학자들은 와세다대학의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도쿄제대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경성 제대의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이었다.
당시 실증주의 사학은 랑케(Leopold von Ranke) 류의 실증 사학에 영향을 받아 ‘있는 그대로의 과거 사실’을 강조하는 근대 서양 역사학의 가치 중립적 태도를 내세우고, 사료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경계하여 자료의 해석과 비판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관과 이론을 배제하고 치밀한 문헌 고증을 통한 개별 구체적인 사실의 파악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병도는 한사군(漢四郡)과 삼한(三韓) 위치 비정에 관한 고대사 연구, 고려 시대 풍수 사상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홍직은 임나(任那) 문제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를 진행했고, 김상기는 동학과 고려 시대 한중 관계를 연구했다. 이상백은 조선 건국과 서얼 제도에 관한 연구를, 신석호는 사화당쟁(士禍黨爭)에 관한 연구를 진행시켰다. 이들은 1934년 진단학회(震壇學會) 결성을 주도하고 『진단학보』를 발행하면서 자신들의 연구를 진작시키고 학풍을 다져나갔다.
이들의 연구는 합리성과 비판성을 근거로 사료를 재음미하고 치밀한 사실 추구를 통해 정확한 역사적 지식에 도달하려 하였다. 이는 한국학계의 역사 연구 방법론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고, 역사학을 분과 학문으로서 정착시키는 데도 공헌했다. 그러나 실증주의 사학은 개별 사실의 정확한 파악에 집중한 나머지 기존의 역사상을 그대로 인정하는 경향이 많았고, 이는 자신들의 스승이기도 했던 일제 관학자들의 논리를 부정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고 평가된다. 이들 중 일부는 조선 총독부 조선사 편수회에 들어가 한국사를 왜곡하고 식민 사관을 확산하는 『조선사』 편찬에 종사했으며, 조선사 편수회와 경성 제대 일본인 역사학자들이 조직한 청구학회(靑丘學會) 등에서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다. 때문에 실증주의 사학자들은 일제 관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식민 사학을 심화시키고 확대하는 데 기여한 측면도 적지 않았다.
해방 후 사회 경제 사학자들이 대부분 월북하고, 정인보, 안재홍, 손진태, 이인영 등 민족주의와 신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6⋅25 전쟁 때 납북됨으로써, 실증주의 사학자들이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주류가 되었다. 이들은 일제 말기 중단되었던 학회 활동을 재개하고 주요 대학에 자리를 잡은 뒤 후진을 양성하면서 역사학계를 주도해 갔다.
▶ 관련자료
- ㆍ실증주의 사학(實證主義史學)
-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한국사 연구의 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