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 합작
제목 | 국공 합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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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國共合作 |
유형 | |
시대 | 근대 |
관련국가 | 중국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1924~1927년과 1937~1945년에 성립했던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의 연합 전선.
[내용]
중국 근현대사를 이끈 두 세력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있다. 이들 각각은 현재 중화민국(臺灣, 타이완)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중심이 되는 정치 세력이다. 중국 국민당은 1919년 10월 쑨원(孫文, 1866~1925)을 중심으로 성립했다. 중국 공산당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하는 기관이었던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출발했다.
쑨원은 1921년 소련에서 레닌이 시작한 신경제정책과, 중국 국민당에 재정과 군사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코민테른의 제안에 관심을 보였다. 한편 레닌이 주도하여 1920년 7월 코민테른 제2회 대회 때 채택된 ‘민족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에서는 혁명적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과의 반제통일전선을 통해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전망이 제시되었다. 그러면서 식민지 등의 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테제에 입각해 중국 공산당과 반제통일전선을 함께 할 세력으로서 중국 국민당이 지목되었다. 코민테른은 쑨원과 접촉을 계속했고, 1923년 1월 소련의 외교관인 이오페(Adolf Abramovich Ioffe)와 쑨원 사이에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선언에서 양자 사이의 제휴가 명시되었다. 또 쑨원은 공산주의자의 국민당 입당을 허락했다. 이어 1924년 1월 국민당은 광저우(廣州)에서 열린 제1회 전국 대표 회의에서 공산주의 세력과의 협력을 선언했고,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24명 중 리다자오(李大釗, 1889~1927) 등 3명의 공산당원을 참가시켰다. 이를 계기로 제1차 국공 합작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합작은 1925년 3월 쑨원 사후 균열이 발생했다. 국민당 내부에는 공산당원이 국민당의 요직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당원이 많았다.
1926년 7월 중국 남부 광둥성(廣東省) 일대에 머물러 있던 중국 국민정부의 중국 통일을 위한 북벌이 소련의 지원과 국공 합작의 기반으로 시작되었다. 북벌은 대중들의 열렬한 호응과 광범한 참여 속에 군벌군을 패퇴시키고 파죽지세로 진행되었다. 북벌군 총사령관이자 국민당의 새 지도자 장제스(蔣介石, 1887~1975)는 북벌의 성공적 진행으로 영향력이 급속하게 커졌다. 그러자 장제스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 소련 고문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한편 북벌과 함께 각 지역에서는 민중 운동이 급속히 일어났는데, 공산당의 통제를 넘을 정도로 급진적으로 전개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민중 운동의 급격한 고양은 자산가들과 지주들의 공포와 반발을 불러왔고, 이들을 기반으로 한 국민당 우파의 반공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장제스는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당 우파의 편에 서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런 가운데 장제스는 1927년 4월 상하이에서 반공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에 대한 전면 탄압에 나섰다. 공산당과의 협력을 둘러싸고 국민당은 처음에는 우한의 좌파 정부와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난징의 국민당 정부로 분열되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토지 혁명의 실시와 국민당에 대한 전면 무장 투쟁에 나섰는데, 국민당 우파는 물론 좌파에 대해서도 투쟁하였다. 때문에 우한 좌파 정부는 국공 합작의 종식을 선언하고 난징의 우파 정부와 통합하여 함께 공산당을 탄압하였다. 이로서 제1차 국공 합작은 붕괴되었다.
이후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국공 합작이 추진되었다. 1935년 말부터 중국 동북군벌이었고 중국 국민당의 부위원장인 장쉐량(張學良, 1898~2001)의 부대와 중국 공산당 사이에서 화베이(華北) 지역을 침략한 일본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해 교섭이 은밀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항일 투쟁보다는 공산당 토벌만을 계속 독려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군에 쫓겨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을 떠나온 장쉐량 부대의 불만이 높아갔고, 급기야는 1936년 12월 장쉐량이 내전중지와 일치항일을 내세우며 시안에 온 장제스를 체포하는 ‘시안 사건’을 일어났다.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협상이 이루어지면서 국공내전은 정지되었다. 양측은 항일 투쟁을 위한 협상에 돌입하였고 그 뒤 공산당은 국공 합작 선언을 발표했다. 1937년 9월 23일 장제스도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하며 선언을 수용했다. 이로써 제2차 국공 합작이 성립되었다. 국공 합작은 일본이 패배하는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물러난 뒤 신중국의 정치 사회 체제와 국가 건설 방향 등을 둘러싸고 양당은 대립했고, 결국 국공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에서 공산당 측이 승리하여 중국 본토를 장악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고, 국민당은 타이완(臺灣)으로 건너가 중화민국을 계승하였다.
두 차례의 국공 합작 과정은 조선과 중국 등지에서 민족 해방 운동을 벌이던 한국 민족 운동 세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1차 국공 합작은 국내에서는 신간회 등 민족 연합 전선의 활동이, 국외에서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추진되는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