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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제목 성균관
한자명 成均館
유형
시대 고려 시대
관련국가 고려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고려 후기 개경(開京)에 설치된 최고의 국립 교육 기관.

[내용]

고려 초 설치되었던 국자감(國子監)을 개편하면서 성균관(成均館)이라 하였다. ‘성균’이라는 명칭은 1298년 충선왕(忠宣王, 재위 1298, 1308~1313)이 국자감을 성균감이라 고치면서 처음 등장하였다. 1308년에 충선왕이 다시 즉위하면서 성균감에서 성균관으로 바꾸었다. 그 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이 반원 정책을 실시하면서 명칭을 원래대로 국자감으로 고쳤다가, 1362년(공민왕 11)에 성균관으로 환원하였으며 이후 조선 시기까지 그대로 명칭이 계승되었다.

원래 국자감에는 유학 학부와 기술 학부가 함께 있었다. 기술 학부는 율학(律學)⋅산학(算學)⋅서학 (書學)으로 나뉘고, 8품 이하의 자제와 서인(庶人)이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충선왕 대에 성균관으로 개칭되면서 유학 학부가 강화되고 기술 학부가 분리되는 경향으로 갔으며, 조선 시기에는 유학 중심의 교육 기관이 되었다. 공민왕 대 신돈(辛旽)이 개혁을 추진하던 시기에 성균관을 개경(開京) 동북쪽에 있었던 숭문관(崇文館) 터에 새로 짓고 이색(李穡)을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삼았다. 이색은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등을 선발하여 교관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당대 신진 학자들이 성균관에 모여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교류를 나누고 고려 말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들 대부분이 고려 말의 개혁이나 조선의 건국에 관여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의의]

성균관은 고려 후기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유학 교육의 최고 기관으로 자리 잡았으며, 고려 말 신진 사대부들이 성장하고 개혁 논의를 펼치는 중심 기관이 되었다. 또한 성균관은 조선으로 이어져 조선의 국립 교육 기관인 성균관의 모태가 되었다.

▶ 관련자료

ㆍ성균관(成均館)
ㆍ국학(國學)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