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용어 해설시대별 > 근대

박문국

제목 박문국
한자명 博文局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883년(고종 20) 8월 인쇄와 출판을 위해 설치된 기관.

[내용]

1880년대 초반 미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과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 정부는 본격적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정부는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새로운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고, 임오군란 이후에는 통리군국사무아문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확대하였다.

박영효(朴泳孝)를 비롯한 급진개화파는 개화 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신문과 같은 근대적 인쇄 매체와 외국 서적의 발행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정부는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안에 설치되어 있던 동문학(同文學)의 하부 기구로 박문국을 만들었다. 박문국은 1883년 10월 31일 〈한성순보〉 발간을 시작했다. 초대 총재에는 민영목(閔泳穆), 부총재에는 김만식(金晩植)이 임명되었다.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 의해 파견되었던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가 고문으로 활동했고, 박문국의 인쇄 기사와 인쇄 기계 등도 일본에서 도입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급진개화파의 주도로 설치된 박문국 역시 공격을 받아 건물과 인쇄 기계가 파괴되었고, 〈한성순보〉의 발행 역시 중단되었다. 1885년(고종 22) 5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건의에 따라 박문국이 다시 설치되었고, 〈한성순보〉는 〈한성주보〉로 복간되었다. 박문국은 신문 외에 1886년에는 조선, 중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소개한 『만국정표(萬國政表)』를 출판했다. 박문국은 만성적인 재정 적자로 인해 1888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그 기능이 부속되면서 폐지되었다.

▶ 관련자료

ㆍ박문국(博文局)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