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용어 해설시대별 > 근대

민족주의 사학

제목 민족주의 사학
한자명 民族主義史學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민족사학(民族史學)
별칭•이칭

[정의]

일제 식민사학에 대항하여 민족 문화의 우수성과 한국사의 주체적인 발전을 강조한 역사학.

[내용]

민족, 민족주의라는 용어는 대한제국기에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 민족이란 단어는 초기에 ‘겨레’와 같이 혈연 공동체로서의 개념이 강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국권 침탈이 심화되자,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여 국권 회복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민족을 단위로 근대적 국민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이념으로서 민족주의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에 입각한 역사학을 개척한 이가 바로 박은식(朴殷植, 1859~1925)과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이다. 박은식은 『동명성왕실기』 등 여러 영웅의 전기를 통해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했다. 1910년대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근대 이후 일본의 한국 침략 과정을 서술한 『한국통사(韓國痛史)』(1915)를 저술했고, 3⋅1 운동 직후에는 독립투쟁사를 기록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를 남겼다. 특히 『한국통사』에서는 물질적인 백(魄)을 잃더라도 정신적인 혼(魂)을 간직하면 백이 부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로써 민족혼이 살아나야 민족이 흥할 수 있다는 ‘국혼론’을 주장했다. 신채호는 ‘국가는 민족정신으로 구성된 유기체’라는 인식을 가지며 많은 사론을 발표했다. 1908년에는 『독사신론』을 통해 대한제국기 역사교과서에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식민 논리를 비판했다. 또 유교 사관을 사대주의로서 비판하고 단군 후예인 부여족과 만주를 중심으로 조선의 역사를 다시 쓸 것을 제안했다. 이는 만주를 수복하여 광대한 민족 국가를 재건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다. 그의 고대사 연구는 『대동역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문화사』를 거쳐 『조선상고사』 저술을 통해서 완결되었다. 그는 이전까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신수두 시대에서 삼조선 시대로, 전삼한이 후삼한으로 이어지는 역사 계승 의식을 내세웠다. 이에 걸맞게 한민족의 역사 무대도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고 만주를 비롯하여 산서⋅하북⋅산동⋅강소성까지 넓혔다

신채호와 박은식이 개척한 민족주의 사학은 1930~1940년대 정인보(鄭寅普, 1893~1950)와 안재홍(安在鴻, 1891~1965), 문일평(文一平) 등이 계승했다. 이들은 앞 세대가 세운 기초 위에 고증을 더욱 치밀히 하고 새로운 연구 방법을 도입해 갔다. 정인보는 『양명학연론』과 『5천년간 조선의 얼』을 저술해 양명학과 실학에서 한국인의 주체성을 탐구하고, 역사의 본질을 얼, 곧 민족정신에서 찾으려 했다. 그는 1930년대 중반 조선학 운동을 통해 조선 후기 특정의 학문 경향이었던 ‘실학’을 주체적이고 근대적인 민족 학문으로서 재발견했다. 그는 신채호의 고대사 연구를 계승해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를 고증하고 광개토왕비문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일본의 식민 사관에 대항했다. 정인보와 함께 조선학 운동을 이끈 안재홍은 비교언어학과 인류학 등의 방법론을 수용해 민족주의 사학을 과학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민족을 혈연⋅지역⋅운명 공동체로 정의했으며, 조선학을 통해 한국 문화의 고유성과 함께 국제적 보편성을 추구하려 하였다. 또 『조선상고사감』을 통해 고대사 연구를 심화했다. 한편 문일평은 조선 시대를 연구하여 조선심(朝鮮心)⋅민중성⋅실리성을 찾고자 했다. 그는 한국사 해석에 문화와 민중적 요소를 가미시켰으며, 평이한 사론으로 민족주의 사학의 대중화에도 공헌했다.

민족주의 사학은 한국 문화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한국사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식민 사관을 비판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40년대 이후 민족주의 사학은 안재홍과 손진태 등에 의해 민중성과 개방성을 강조하면서 세계사 속의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신민족주의 사학으로 발전해 갔다.

▶ 관련자료

ㆍ민족 사학(民族史學)
ㆍ민족주의 사관(民族主義史觀)
ㆍ민족주의 사학(民族主義史學)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