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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식산 은행

제목 조선 식산 은행
한자명 朝鮮殖産銀行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18년 10월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개발⋅수탈에 필요한 자금을 동원하고 배분하기 위해 설립한 특수 은행.

[내용]

1910년대 후반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 종료 후 이를 바탕으로 생산 부문을 장악하기 위해 산업 금융 기관을 강화하려 했다. 그런데 지방 농공업의 개발을 명분으로 1906년부터 설립된 농공은행은 자금력이 취약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전후로 경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조선 총독부는 1918년 7월 제령 제7호로 「조선 식산 은행령」을 공포하여 6개 농공은행을 강제로 통합하고, 10월 조선 식산 은행(이하 ‘식은’)을 설립했다. 이에 따라 식은은 농공은행에 비해 자본금이 260만 원에서 1,000만 원으로 증대되었다. 업무 영역도 확장되어, 농공업 외의 산업에도 부동산 담보 대부를 인정했고 국채와 채권 등에 대한 유가 증권 담보 대출도 가능해졌다. 또 채권 발행 한도도 납입 자본금의 10배로 인상해(1924년부터는 15배) 자금 조달력을 강화했다. 두취(대표이사)는 조선 총독이 임명하고, 이사는 주주 중에서 총독이 임명하는 등 총독부의 관리 권한도 강화했다.

식은은 창립 시에는 조선의 전 금융 기관에서 대출 점유율이 20%였지만, 1931년에는 44%로 증가하는 등 일제 시기 최대의 금융 기관이 되었다. 1920~1930년간 납입 자본금은 4배, 적립금은 13배, 예금은 4배 늘어났다. 특히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식은은 산미 증식 계획과 농업 개발을 지원했다. 1926년부터 시행된 제2차 산미 증식 계획의 정부 알선 자금도 식은이 분담했다. 식은은 농업 관개 사업을 시행했던 수리 조합 사업과 개간과 간척 등 토지 개량 사업 등 농업 분야에 자금 대부를 집중했다. 또한 지방에서 농업 등 융자 업무를 담당했던 금융 조합에 대한 대부도 크게 늘렸다. 이로써 전체 농업 대출의 경우 1918년 654만 원이었다가, 1936년에는 2억 1,966만 원으로 가장 빠르게 증가했다.

농업 금융으로서의 활동에 주력하던 식은은 1934년 산미 증식 계획이 중단되면서 농업 부문으로의 대출 비율이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1937년 중일 전쟁 이후로는 경영 방침을 크게 바꾸어 군수 공업과 광공업 금융 분야에 적극 진출하였다. 일제는 1937년 「임시자금조정법」과 1940년 「은행 등 자금운용령」 등을 공포해 식은을 군수 부문 등 광공업 분야에서 총독부의 명령을 받는 은행으로 지정했다. 이 과정에서 광공업 대출액은 1936년 8,032만 원에서 1942년 4억 4,775만 원으로 급증했다. 그 결과 식은의 산업별 대출 구성은 같은 기간 농업 부문은 48%에서 19%로, 공업은 12.5%에서 35.8%로 큰 변화를 보이게 된다. 또 1930년대에 식은은 사채 및 대출, 직원 파견을 통해 특정 기업의 설립 및 인수에 직접 참여하여 ‘식은계’ 기업 집단을 형성했다. 이 계열의 주요 회사로는 성업사, 조선저축은행, 조선신탁, 조선 화재 해상 보험, 조선 우선(朝鮮郵船), 한국 수력 전기, 국산 자동차 회사, 조선 개척, 불이흥업(不二興業), 일본 고주파 중공업 등이었다.

이처럼 식은은 1945년 8월 일제의 식민 지배가 끝날 때까지 조선 총독부의 경제 정책을 뒷받침하던 중추 금융 기관이었다. 해방 뒤 식은은 일본으로부터 자본 도입이 소멸됨에 따라 개발은행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그리고 1954년 제정된 「한국산업은행법」에 의해 개발은행 업무를 담당하는 국책 은행으로서 한국산업은행이 설립되게 된다.

▶ 관련자료

ㆍ조선 식산 은행(朝鮮殖産銀行)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