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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 백화점

제목 화신 백화점
한자명 和信百貨店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32년 박흥식(朴興植, 1903~1994)이 서울에 설립한 백화점.

[내용]

백화점은 근대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상징이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는 자본주의 이식이 진행되고, 유통업도 발전하면서 백화점 영업이 시작되었다. 경성(서울)에는 일본 최대의 백화점이었던 미츠코시(三越)가 1906년 충무로에 출장소를 개설한 이래 1921년 조지아(丁子屋), 1922년 미나카이(三中井), 1926년 히라타(平田)가 차례로 백화점을 개설했다. 이들 백화점은 오복점(吳服店) 수준이었는데, 1929년 미츠코시가 미츠코시 오복점 경성출장소를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 지점으로 승격시킨 이후 차례로 현대식 백화점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일본인 자본에 의한 것으로 일본인 거주지인 지금의 충무로 일대에 세워졌다.

이에 반해 한국인이 세운 백화점은 한국인의 전통적인 상업 지역인 종로에 위치했다. 동아부인상회를 경영하던 최남(崔楠)은 1932년 1월부터 최초의 한국인 백화점인 동아 백화점(東亞百貨店) 영업을 개시했다. 화신 백화점은 본래 신태화(申泰和)의 화신상회에서 출발했는데, 경영난을 겪자 박흥식(朴興植)이 이를 인수해서 1931년 9월 ㈜화신상회를 설립했고, 이를 1932년 5월 화신 백화점으로 발전시켰다. 당시 화신 백화점(이하 화신)은 약 500평 넓이의 콘크리트 3층 건물로 종업원 153명이 종사했다. 그런데 동아백화점과 화신 백화점은 종로에 나란히 위치하면서 과도한 출혈 경쟁을 벌였고, 이 때문에 큰 손실을 입었다. 양자가 타협 끝에 박흥식은 1932년 7월 동아 백화점을 인수 합병했다. 이로써 화신은 경성 유일의 한국인 백화점이 되었다.

1930년대 백화점 업계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도 경영을 확대해 갔다. 이는 매장 확대와 백화점업의 지방 진출로 나타났다. 화신 역시 1935년 화재로 손실을 입기도 했으나, 곧 이를 만회하고, 1937년 11월에 지하 1층, 지상 6층의 신관을 완공했다. 이로써 경성에 3,011평의 대형 매장이 마련되었고, 매장에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등 최신식 시설을 갖추었다. 또 지방으로 영업을 확대하여 평양과 진남포에 지점을 개설하고, 연쇄점 사업에도 진출해 1934년 당시 전국 각지에 약 350개에 달하는 점포망을 구축했다. 경성 내 5대 백화점 중 가장 후발 주자였던 화신은 성장을 거듭해 1942년에는 미츠코시와 조지아에 이어 업계 3위로 도약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각 지역의 중소상인들이 큰 타격을 받아 백화점 반대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다른 백화점과 마찬가지로 화신도 이윤 추구를 위해 광고를 적극 활용했다. 연말연시와 명절에는 거의 매일 광고를 게재했고, 주요 일간지에 전면 광고를 싣기도 했다. 단골 고객에게는 우편엽서를 보내 신상품을 소개했다. 상품 진열장, 쇼윈도, 네온사인, 마네킹도 활용되었다. 백화점 내에 식당과 휴게실 등 여러 편의 시설을 갖추고, 할인 대매출 기간을 설정하고, 고객들을 위해 문화 강좌 등을 개최하는 모습은 오늘날과 같았다.

화신은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영업을 계속했다. 1946년 12월 화신 주식회사에서 독립해 자본금 2,000만 원의 화신 백화점이 설립되었다. 1950년 1월 다시 화신 주식회사와 통합해 자본금 3억 원의 화신 산업 주식회사로 운영되었다. 1970년대 이후 과도한 사업 확장과 투자로 1980년대 들어 화신 백화점을 운영하던 화신 그룹이 해체되었고, 그 결과 화신 백화점도 1986년 영업을 마감했다.

▶ 관련자료

ㆍ화신 백화점(和信百貨店)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