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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 전문학교

제목 연희 전문학교
한자명 延禧專門學校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15년에 설립된 기독교 계열의 사립 전문학교로서 연세대학교의 전신.

[내용]

연희 전문학교는 1914년 설립된 배재 학당 ‘임시대학 예과’와 경신 학교 ‘임시대학’이 1915년 통합되면서 시작되었다. 학교 설립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가 주도했다. 그는 1886년 5월 언더우드 학당(고아원 및 고아 학교)을 세운 이래 한국에서 교육 선교의 꿈을 키웠다. 그는 1906년 무렵부터 자신이 설립한 경신 학교(1905년 언더우드 학당이 확대 발전)와 제중원 의학교(세브란스 의학교), 감리교 측의 배재 학당 등을 연합하여 기독교 연합 대학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북장로교 한국선교회 내부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후 그는 1912년 미국에서 형 존 언더우드(John. T. Underwood)의 기부금 등 대학 설립 자금을 모아 귀국한 뒤, 각 선교부 간 연합 사역으로 힘을 얻고 다시 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이러한 언더우드의 활동과 함께 1905년 이래의 배재 학당과 경신 학교의 통합 운영, 1906년 미감리회와 미국장로회 선교부 연합의 숭실 학당 운영 등 각 기독교 교파 간 연합 활동의 흐름이 결실을 맺은 것이 바로 연희 전문학교의 설립이었다.

1915년 3월 미국 북장로회, 미국 남⋅북감리회, 캐나다 장로회가 연합하여 서울에서의 연합 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1915년 4월 12일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YMCA) 건물에서 조선 기독 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이 창립되었다. 개교 당시 학생 수는 61명이었고, 교장은 언더우드, 부교장은 에비슨(O. R. Avison)이었다. 1917년 4월 조선 총독부로부터 연희 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며, 문학과, 신학과, 농학과, 상과, 수학 급 물리학과, 응용화학과 등 다양한 학부를 두었다.(학생 정원 400명) 여러 학부를 둔 것은 종합 대학으로의 승격을 겨냥한 것이었으나, 일제 시기 내내 고등 교육을 억제한 일제의 견제와 재정적인 한계로 실현되지 못했다. 1917년 9월 고양군 연희면(현재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동)에 대학 부지가 조성되었고, 1918년부터는 신촌 새 캠퍼스에서 교육이 이뤄졌다. 1923년 3월 학부를 개편하여 문과, 상과, 신학과를 두었고, 1924년 3월에는 총독부로부터 수물과가 인가되었다. 상과는 3년제, 나머지 학과는 4년제였다.

연희 전문의 학풍은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동양과 조선의 사상 및 전통과의 결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식민지에서 민족 정신을 유지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위한 관학(官學)을 추구하던 경성 제국 대학의 학풍과 대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反) 관학적이고 민족주의적 학풍을 최현배, 정인보, 백낙준, 백남운 등이 이끌었다. 또한 학생들도 1919년 3⋅1 운동, 1920년 조선 학생 대회, 1923년 조선 학생회 조직, 1926년 6⋅10 만세 운동, 1929년 광주 학생 운동 등 민족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연희 전문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등 일제가 일으킨 사상 탄압 사건에 주요 교수진이 검거되어 큰 타격을 받았다. 일제 말기에 학교 경영진은 일제와 일정하게 타협하며 학교를 유지하려 했으나, 일제는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뒤 1942년 8월 ‘적산(敵産)’이라는 구실로 재단 이사회를 해체하고 총독부 관리하에 두었다. 1944년 5월에는 결국 폐교되어 경성 공업 경영 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해방 후 1945년 11월 연희 전문학교가 다시 재건하였고, 1946년 8월 종합 대학교인 연희대학교로 개편되었다. 그 뒤 1957년 1월 세브란스 의학대학과 통합하여 현재의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 관련자료

ㆍ연희 전문(延禧專門)
ㆍ연희 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