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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사변

제목 상하이 사변
한자명 上海事變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일본, 중국
유의어 상하이 침공(上海侵攻), 상해 사변(上海事變), 상해 침략(上海侵掠)
별칭•이칭

[정의]

1932년과 1937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군이 상하이(上海)를 침공하여 일어난 중국과 일본 사이의 무력 충돌 사건.

[내용]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며 만주 일대를 점령하자, 중국 각지에서 격렬한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상하이에서는 1931년 11월 일제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는 시민대회가 열리며 중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충돌이 잇따랐다. 이에 일본은 고조되는 항일 운동을 분산시키고 만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국내외 여론을 돌리기 위해 상하이를 공격하기로 했다.

1932년 1월 18일 일본인 승려 일행이 상하이 삼우실업사(三友實業社) 근처에서 중국인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 측이 중국인을 고용하여 일부러 폭력을 조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월 20일 이를 구실로 일본인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부는 삼우실업사 공장을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중국 경찰과 일본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일본 총영사 무라이 구라마쓰(村井倉松)는 상하이 시 당국에 일본인 살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와 가해자 처벌,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 중국 측은 결국 이튿날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중국 측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즉각 군사적 공격을 시작했다.

1월 28일 상하이 조계(租界) 경비를 담당하던 일본의 해군육전대와 중국의 19로군(十九路軍) 사이에 전투가 발발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상하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은 3만여 19로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고, 영국과 미국 총영사의 중재로 일시 정전 협약이 성립했다. 중국은 국제 연맹에 일본의 침략을 제소했다. 그러나 일본은 2월 5일 육해군을 포함해 총 1만 7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일본군은 중국군을 퇴각시키고 상하이를 점령한 뒤 3월 3일 전투 중지를 명령했다. 이어서 일본은 ‘거류민 보호’ 목적을 이뤘다면서 중국과 정전 협정에 착수했다. 3월 하순부터 중일 양국 및 중국에 많은 이권을 갖고 있던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4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정전 회담이 열렸다. 결국 5월 5일 국제 연맹의 협정안 채택을 거쳐 정전 협정이 성립했다. 중국 정부의 반일 운동 단속과 19로군의 교체 및 비무장화를 조건으로 일본군은 7월 17일 상하이에서 철수했다.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차오(盧溝橋) 부근에서 일본군 사병 1명이 실종된 것을 구실로 일본군은 이 지역을 수색하겠다고 중국군에게 통보하였다. 중국군은 주민 불안을 이유로 들며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에 일본군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이른바 노구교 사변 또는 7⋅7사변이 일어났다. 11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일본은 중국 침략을 오히려 가속화하여 7월 말에는 베이징과 톈진을 점령하였다. 이에 중국 각지에서 항일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때 두 번째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다. 8월 9일 일본 해군육전대의 오야마 도시오(大山勇夫) 중위가 정찰 중에 중국 보안대에 사살되자, 일본은 육군 2개 사단을 상하이에 파병했다. 13일 양국 군대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고, 상하이 전투는 11월 9일까지 3개월에 걸쳐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9,115명이 전사했지만, 중국 측은 민간인 포함 20~25만 명이나 희생되었다. 이후 난징(南京)⋅우한(武漢) 등 중국 전토로 전쟁이 확대되었다. 곧 이때의 상하이 사변은 중일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사건이 되었다.

▶ 관련자료

ㆍ상하이 사변(上海事變)
ㆍ제1차 상해 사변(上海事變)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