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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참배

제목 신사 참배
한자명 神社參拜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일본의 국가 종교인 신도(神道)의 신사(神社)를 찾아 참배하는 행위.

[내용]

신사는 신도의 사당(祠堂)이다. 신도는 일본 고유의 사상으로 조상 숭배나 일왕 숭배를 핵심으로 하는 국수적인 일본 토착 종교였다. 이러한 신도가 천황제를 지탱하는 국가신도(國家神道)로 변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운 정치 질서가 등장하면서 자국민을 통합할 상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대내적으로는 신도를 통해 일왕을 중심으로 자국민의 단결을 도모하고, 대외적으로는 타민족을 지배하고 동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일제가 점령한 곳마다 신사를 세운 것은 이러한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한국 강점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에 신사를 세웠다. 특히 1917년에는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好道) 총독이 “조선통치상 가장 긴요한 것”이라며 서울의 남산에 일본 황실의 시조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일왕을 제신으로 하는 조선 신궁(朝鮮神宮) 설립을 추진하였다. 조선 신궁은 1925년에 완성되었는데, ‘동화주의’와 식민 통치를 한국인들에게 보여 주는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신사 참배는 1920년대에도 문제가 된 적이 있지만, 1930년대에 들어 일제가 대륙 침략을 전개하면서 강화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1935년부터는 한국인 학생들에게 조선 신궁 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했다. 개신교 학교의 선교사들과 학생들은 처음에는 신앙상의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총독부의 양해를 구하였으나, 총독부가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 학교장 신사 참배 거부 사건을 계기로 강경책으로 나오자 기독교계는 분열되었다. 1937년부터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던 상당수의 개신교 계통 학교는 결국 폐교되는 등 큰 불이익을 받았지만, 일부는 ‘순응’하고 신사 참배를 하였다.

신사 참배를 정책적 차원에서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36년 6월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이 부임하면서부터였다. 미나미 총독은 부임 직후 「신사규칙(神社規則)」을 개정⋅공포하였다. 전국에 57개의 신사를 새로 건립했을 뿐만 아니라 ‘1면 1신사(一面一神社)’ 원칙을 세워 산간벽지의 면 단위까지 신사를 건립하도록 했다. 일제 말기에는 전국의 신사가 약 1,000여 개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신사 참배가 정책적으로 강요되기 시작한 것은 중일 전쟁을 시작으로 일본이 전시 체제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표어 아래 한국인을 전쟁에 자발적으로 동원하고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사 참배가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이는 일왕 숭배를 통해 일왕 및 일본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주입하고 확인하려는 행위였다.

1937년 7월 중일 전쟁 이후에는 황민화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신사 참배는 학생만이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강요되었다. 미나미 총독은 1937년 9월 6일을 애국일로 정한 후 매월 6일에 애국일 행사를 갖도록 했다. 애국심 고취를 위한 행사를 통해 한국인에게 일왕에 대한 숭배를 요구하였고 신사 참배는 그런 행사의 주요한 의례로서 행해졌다. 또한 신사 참배와 마찬가지로 일왕이 있는 도쿄를 향해 절을 하는 궁성요배(宮城遙拜)도 한국인들에게 강요했다. 신사 참배는 단순한 종교적 의례가 아니라 일왕에 대한 숭배를 통해 일제의 지배력을 공고하게 하려는 수단이었다. 일제는 신사 참배를 통해 한국인의 동화와 자발적 전쟁 참여를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1945년 해방 직후,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던 신사는 한국인들에 의해 파괴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신궁은 일본인들에 의해 스스로 철거 소각되었으며, 그 터에는 현재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 관련자료

ㆍ신사 참배(神社參拜)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