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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민족 혁명당

제목 조선 민족 혁명당
한자명 朝鮮民族革命黨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중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30년대 중반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진보적 성격의 독립운동 정당이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야당의 역할을 담당했던 정당.

[내용]

1934년 3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대회에서 모든 혁명 단체의 해산과 ‘단일 대당’ 결성, 임시 정부의 해산이 제안되었다. 이 주장에 대해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 혁명당, 대한독립당(미주)은 찬성하였고, 한국 독립당은 분열하였다. 그 결과 1935년 6월 중국 난징(南京)에서 각 혁명 단체 대표자 대회가 개최되었고, 7월 한국 독립당,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 혁명당, 대한독립당 등 5개 단체가 통합해 민족 혁명당(한국 민족 혁명당, 조선 민족 혁명당으로도 부름. 이하 민혁당)을 창당했다. 당시 임시 정부 국무위원 7인 가운데 송병조, 차리석을 제외한 양기탁, 최동오, 유동열, 조소앙, 김규식 등이 민혁당에 참여하는 등 중국 관내 대부분 세력을 망라했기 때문에 민혁당은 한때 중국 내 최대 정당이 되었다.

민혁당은 민족의 자주 독립, 봉건 제도 및 반혁명 세력의 일소, 평등한 경제 제도 건설, 남녀 평등, 토지의 국유화와 분배, 국가의 계획 경제 실시, 노동 운동의 자유, 의무 교육 실시 등을 강령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계파 응집력이 강했던 의열단계와 그 지도자인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이 당무를 주도하자, 9월 조소앙(趙素昻)과 홍진(洪震) 등 일부 인사가 탈당하여 한국 독립당을 재건했다. 이후 김원봉 중심의 의열단계와 지청천(池靑天) 중심의 반의열단계 사이에 당권 경쟁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1937년 1월 제2차 전당 대회에서 의열단계가 주도해 당명을 조선 민족 혁명당으로 확정하고 김원봉을 총서기로 임명했다. 4월 김원봉의 당권파가 지청천, 최동오 등 반당권파 핵심 인물 11명을 제명하자, 반당권파들이 대거 탈당해 조선 혁명당을 재건했다. 이로써 당의 좌⋅우 통일전선체로서의 성격이 약화되었다.

민혁당은 중일 전쟁 이후인 1937년 11월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 아나키스트 단체인 조선 혁명자 연맹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1938년 10월 김원봉을 대장으로 하여 무장 부대인 ‘조선 의용대’를 결성하여 항일 전쟁에 참여했다. 조선 의용대는 중국 국민당과의 협의 아래 한중 연대의 산물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일본군에 대한 정치 선전 공작 임무를 수행했다. 한편 당시 중국 관내에는 임시 정부 옹호를 원칙으로 한 김구(金九)의 한국국민당 중심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가 조직되어 조선민족연맹과 병립하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는 김구와 김원봉의 연합을 요구했다. 그 뒤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이 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중국 내 단체의 통합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성과를 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이후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이끌던 최창익(崔昌益) 등이 중국 공산당이 있는 옌안(延安)으로 떠나고, 조선 의용대원 중 상당수 대원들이 1941년 6월 화베이의 중국 공산당 팔로군 주둔지로 북상하면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한편 1940년 5월 한국국민당과 (재건)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이 통합하여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여 임시 정부의 여당 역할을 담당했다.

1941년 가을 중국 국민당은 김구와 김원봉의 합작을 다시 요구하였고,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를 조국 독립의 기회로 인식하여 적극적인 대일 항전의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이에 민혁당은 1941년 12월 제6차 전당 대회에서 임시 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그리고 1942년 10월 임시 정부 임시 의정원에 참여하여 당원 10명이 의원에 선임되었고, 김규식과 장건상이 임시 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잔류한 조선 의용대원들은 광복군에 합류했다. 민혁당은 임시 정부 참여 직후부터 임시 정부의 개조와 건국 강령의 개정을 시도하여 전 민족의 통일 전선 기구로 개편하려 했다. 1944년 4월 임시 정부의 조직과 체제가 개편되면서 김규식이 부주석에, 김원봉이 군무부장에 선임되었고, 국무위원 14명 중 한국 독립당에 8명, 민혁당에 4명이 배정되었다. 이로서 임시 정부는 명실상부한 통일 전선 정부를 이뤘다.

1945년 12월 민혁당 세력은 임시 정부의 일원으로 귀국했다. 귀국 직후 민혁당 세력은 임시 정부를 대표해 국내 좌우 세력의 통일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의 대립이 극심해지고 좌우 합작이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자, 민혁당도 어느 한쪽에 설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1946년 2월 민혁당은 임시 정부를 탈퇴하고 좌익 세력의 연합체인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담했다. 그렇지만 8월 남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이 좌익 정당의 통합을 시도할 때 민혁당은 참여하지 않았다. 1947년 6월 민혁당은 조선인민공화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이후 의장인 김원봉이 1948년 월북하자 당은 해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