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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요 10조

제목 훈요 10조
한자명 訓要十條
유형
시대 고려 시대
관련국가 고려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가 박술희(朴述熙, ?~945)에게 비밀리에 남긴 유언.

[내용]

943년(태조 26)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왕실 자손들에게 훈계하기 위해 남겼다고 전하는 열 가지 항목으로, 태조가 친히 대광(大匡) 박술희(?~945)를 불러 비밀리에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태조 사후에도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다가, 현종(顯宗, 재위 1009∼1031) 대 거란의 침입 후에 최제안(崔齊顔, ?~1046)이 최항(崔沆, ?~1024)의 집에서 발견하여 전해지게 되었다는 내용이 『고려사(高麗史)』 열전 최제안전에 전한다. 이러한 단편적인 정보 외에는 최항이 자료를 보관하게 된 경위와, 최제안이 입수한 과정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없어 논란이 있다. 또한 「훈요 10조」가 태조 사후 바로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 「훈요 10조」의 여러 조항을 후대 왕이 준수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은 위작설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훈요 10조」는 서론 격인 신서(信書)와 총 10개 조의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10개 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조와 제2조는 함부로 불교 사원을 세우지 말고 도선(道詵)이 정해 놓은 곳에만 짓도록 해 불교에 대한 우대와 동시에 통제를 강조하고 있다. 제3조는 왕위 계승에 관한 것으로, 적장자가 왕위 계승자로 적절하지 못할 경우 차자(次子)나 형제 중에서라도 계승시킬 것을 당부하였다. 제4조는 중국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무조건 따라서는 안 된다며 고려 고유 문화를 중시하는 의식을 담고 있고, 특히 거란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보이고 있다. 제5조에서는 서경(西京)이 지맥의 근본이므로 국왕이 그곳에 일정 기간 머무를 것을 당부하였고, 제6조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꼭 실천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7조와 제9조에서는 인사와 상벌을 공정히 하고, 직언하는 신하를 가까이 둘 것이며, 백성들의 부역을 적절히 하고 군대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였다. 제8조는 가장 논란이 많은 조항인데,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바깥이 배역(背逆)의 지세이므로 이들 지역 사람을 등용하지 말고, 노비나 잡척(雜尺)을 함부로 등용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10조는 경사(經史) 서적을 널리 보아야 하는데, 특히 『서경(書經)』의 「무일편(無逸篇)」을 그림으로 그려 붙여 드나들 때마다 보면서 반성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훈요 10조」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여, 불교⋅풍수⋅유교적 정치 이념이 혼합되어 있으며, 지역이나 신분제적 차별 의식도 그대로 담겨 있다. 대외적으로는 거란에 대한 강한 경계 의식을 보이며, 중국 문명을 존중하면서도 고려의 독자적인 풍속을 중시하도록 당부하는 등 문화적 독자성도 잘 보여 주고 있다.

[의의]

「훈요 10조」는 뒤늦게 공개되었지만, 이후 고려 왕들은 「훈요 10조」를 고려 왕실의 헌장으로 여기고 태조의 유훈을 존숭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서경 천도를 비롯한 여러 풍수적 행위가 이루어졌으며, 연등회와 팔관회가 가장 중요한 의례로 거행되었다. 또한 중국 문물을 도입하려고 한 시기마다 「훈요 10조」에 기반한 논쟁을 펼치기도 하는 등, 고려 사회에서 정치적 헌장으로서 영향력을 드러내었다.

▶ 관련자료

ㆍ훈요 10조(訓要十條)
ㆍ신서십조(信書十條)
ㆍ신서훈요십조(信書訓要十條)
ㆍ십훈요(十訓要)
ㆍ훈요(訓要)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