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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점

제목 은점
한자명 銀店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은광(銀鑛)
별칭•이칭

[정의]

조선 시대 은을 채굴하여 제련하던 광산.

[내용]

은(銀)은 자체로 가치가 있는 고가의 금속으로 무역의 결제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명(明)에 은을 세폐(歲幣)로 바치면서 국외로 유출되는 양이 늘어갔다. 농토와 광산을 왕토(王土)와 동일하게 인식하였던 조선 정부는 광산물이 국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광산을 직접 운영하거나 공납(貢納)을 적용시켜 민간에서 광산을 운영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과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은의 사회적 수요가 급증하였고 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 개발에 대한 관심이 민간에서도 고조되었다. 이에 민간에서 은광을 개발하고 대신 곡식을 바치는 ‘민채납곡제(民採納穀制)’가 시행되기도 했다.

양란 이후에는 무기에 대한 관심과 군문(軍門)이 신설되면서 광산을 경영하는 문제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가가치가 높은 은이 생산되는 은점은 각 지역의 군문과 중앙의 호조(戶曹) 사이에 수세권을 놓고 쟁탈전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호조는 지역 군문의 은점을 흡수해 나갔다. 특히 별장(別將)이라는 임시 관원을 통해 광산의 운영과 수세를 책임지게 하는 호조의 ‘설점수세(設店收稅)’제 시행에 따라 은점이 활발하게 개발되었다. 그러나 호조의 직권을 대리한다는 명목 아래 대부분의 이익을 별장이 차지하게 되면서 국가는 은점의 신설을 왕의 허락하에만 허가한다는 ‘경품설점법(經品設店法)’을 제정하여 은점의 확대를 막았다. 이러한 국가의 통제책에도 불구하고 은점에서 취하는 이익이 상당하였기 때문에 은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19세기 들어 은점은 민간업자들이 등장하며 다시 채굴에 활기를 띠게 된다.

▶ 관련자료

ㆍ단천공은점(端川貢銀店)
ㆍ은광(銀鑛)
ㆍ은점(銀店)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