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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시찰단

제목 조사 시찰단
한자명 朝士視察團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조선, 일본
유의어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별칭•이칭

[정의]

1881년(고종 18) 4월 일본에 파견된 문물 시찰단.

[내용]

1876년(고종 13) 일본과 조일 수호 조규를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게 된 조선 정부는 조약 체결 직후 일본의 요청에 의해 수신사를 일본으로 파견했다. 특히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은 일본 주재 청국 공사관 참사관 황준헌(黃遵憲)의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조선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책의 주요 내용은 남하하려는 러시아를 막고 조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친중(親中), 연미(聯美), 결일(結日)의 외교 정책을 취해야 하며 자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책 내용이 알려지자 정부 내에서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재야에서는 보수 유생들을 중심으로 위정척사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막고 국가를 보전하기 위해 조선 역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80년(고종 17) 조선 정부는 먼저 개화 정책을 추진할 기구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했다. 그리고 조선보다 앞서 문호를 개방하고 근대화를 시작했던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기 위해 시찰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조선 정부는 1881년 2월 조사(朝士), 수원(隨員), 통사(通事, 통역사), 하인(下人) 등 62명을 선발하여 동래부 암행어사라는 명목으로 비밀리에 부산으로 보냈다. 조사에는 조준영(趙準永), 박정양(朴定陽), 엄세영(嚴世永), 강문형(姜文馨), 조병직(趙秉稷), 민종묵(閔種黙), 이헌영, 심상학(沈相學), 홍영식(洪英植), 어윤중(魚允中), 이원회(李元會), 김용원(金鏞元) 등이 임명되었다. 각 조사는 수원 2인, 통사 1인, 하인 1인을 대동하여 한 반(班)을 만들었는데 각각의 반은 시찰 대상을 정하여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시찰단은 1881년 4월 10일 부산을 출발하였다. 약 3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문교, 내무, 농상, 외무, 재무, 군부, 포병 공창, 세관, 조폐, 도서관, 박물관 등의 정부 기관과 산업 시설을 시찰하였다. 시찰단은 7월 24일 일본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는데, 조사 시찰단원 중 유길준, 유정수(柳定秀), 윤치호, 김양한(金亮漢) 등은 유학을 하기로 결정되어 일본에 남았다. 시찰단은 시찰한 결과를 「문견사건(聞見事件)」으로 작성하여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는 조선 정부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 관련자료

ㆍ시찰단(視察團)
ㆍ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