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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 협회

제목 황국 협회
한자명 皇國協會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대한제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898년 6월부터 1898년 말까지 활동한 보부상(褓負商)의 이권 단체.

[내용]

조선 시대 전통 상인의 일종인 보부상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했던 정부 기구 상리국(商理局)의 폐지 이후 전국적인 규모의 이권 단체를 만들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대한제국의 황제 주도의 상업 체제 확립을 지향하던 세력의 의도와 부합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보부상뿐 아니라 정부 관료, 의병 세력까지 발기인으로 참여한 황국 협회가 설립되었다. 황태자는 회의 경비 명목으로 1,000원을 하사했고, 발회식에서는 “나라를 문명부강케 하는 도리는 황실을 존숭(尊崇)함에 있고 충군(忠君)하는 대의를 밝힌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또한 발회식에 참여한 회원들에게 “보호황실(保護皇室)”, “대한황국협회충군애국(大韓皇國協會忠君愛國)”이 새겨진 표식을 배포하여 자신들의 충군 이념을 강조하였다. 황국 협회는 매월 2회의 통상회, 매년 2회의 총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회장 및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17인의 간부를 포함 107명의 임원을 두기로 하였다.

초대 회장은 현직 관료였던 정낙용(鄭洛鎔, 1827∼1914)이었으나 그 뒤 법부(法部)의 관료 이기동(李基東, 1856~1922)이 많은 보부상 회원을 끌어들이고 회장이 되었고, 고영근(高永根, 1853~1923)이 부회장을 맡았다. 1898년 11월 독립 협회의 만민 공동회 운동이 의회 개설을 내세우며 민권 강화를 주장함에 따라, 황제권의 위기를 느낀 대한제국의 근왕주의 세력들은 황국 협회를 통해 지방 보부상들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11월 21일 홍종우(洪鍾宇, 1854~?) 등의 지휘 아래 약 2,000명의 보부상들은 장기 시위 중인 만민 공동회 참가자들을 기습하여 해산시켰다. 이후 양 세력의 충돌이 서울 시내 곳곳에서 발생하자,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은 양 단체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보부상들은 황국 협회의 해산 직후 정부 기관인 상무사(商務社)에 소속되었고, 이후 진명회(進明會), 공진회(共進會) 등의 형태로 존속되었다.

▶ 관련자료

ㆍ황국 협회(皇國協會)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