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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진흥 운동

제목 농촌 진흥 운동
한자명 農村振興運動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농산어촌 진흥 운동(農山漁村振興運動)
별칭•이칭

[정의]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세계 대공황 이후 식민 지배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 총독부가 전국 농촌을 대상으로 실시한 관제 농촌 운동.

[내용]

1920년대 말 세계 대공황과 1930년 농업 공황으로 인해 농산물 가격이 급락하고 농가 부채와 춘궁 농가가 급증하면서 많은 농민들이 몰락했다. 농촌에서는 지주들의 자의적인 소작권 이동과 수탈 강화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소작 쟁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계급 대립이 심화되었다. 그런 가운데 이를 혁명적 시기로 파악한 사회주의 계열의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면서 농촌 사회의 위기도 가중되었다. 이에 대응해 조선 총독부는 농촌 사회를 통제하고 식민지 지배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1932년 농촌 진흥 운동을 전개했다.

농촌 진흥 운동은 「조선 총독부 농촌진흥위원회 규정」(1932. 9. 30.), 정무총감 통첩 「농산어촌 진흥에 관한 건」(1932.10.8)이 공포되면서 실시되었다. 당시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사회주의 운동의 농촌 침투를 우려하며 농민에 ‘적당한 빵’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농촌 진흥 운동은 관제 농촌 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조선 총독부농촌진흥위원회를 정점으로 그 아래 도⋅군⋅읍면농촌진흥위원회가 조직되었고, 말단 부락(촌락)에는 농촌진흥회가 설치되었다. 각 면에는 1개씩 갱생지도부락이 선정되었고, 부락이 농가별 현황 조사를 실시한 뒤 30~40호 단위로 ‘농가 경제 갱생 계획’을 실행하여 식량 충실과 현금 수지 개선, 부채 정리 등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지시했다. 식민 당국은 약간의 보조금을 촌락에 지급하고 나머지는 농민들이 부담하도록 하면서 보조금을 매개로 한 지도 형식으로 지배력을 관철시켰다. 또한 관의 인적⋅물적 지도력 한계를 보충하기 위해 일제 농촌 지배에 이용할 중견 인물을 양성했다. 중견 인물은 중농층 정도의 계층이었는데, 보통학교 졸업생 지도의 방식이나 농촌청년훈련소와 같은 시설에서 육성되었다.

농촌 진흥 운동은 물질생활의 안정화를 목표로 했지만 실제로는 정신생활의 안정이 중시되었다. 농촌의 피폐와 생활의 어려움이 일본 경제 정책의 실패와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한국 농민 자신의 사치와 나태함에 있다고 세뇌시키며, 자력갱생(自力更生) 의식을 고취시켰다. 곧 색복(色服) 착용, 미신 타파 등의 생활 개량을 장려하면서 근면과 절약, 저축, 금주, 금연, 부업 장려 등의 생활 태도가 적극 권장되었다. 1935년부터 시작된 심전 개발 운동(心田開發運動)은 바로 농촌 진흥 운동을 ‘심전 개발’, 곧 정신 수양 또는 정신 계도로서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 조선인에 대한 조직화와 통제를 확대해 갔다. 이 과정에서 농촌 진흥 운동도 성격이 바뀌었다. 곧 개별 농가의 생활 안정과 자력갱생 대신 ‘생업보국(生業報國)’이 강조되면서, 전쟁 상황에 대한 인식 확산과 전쟁 수행 관련 생산물의 증산이 중시되었다. ‘농가 경제 갱생 계획’에서는 마을 단위의 생산력 확충과 농가 경제 안정이 동시에 추구되었다. 조직 차원에서 총독부는 전시 대중 동원 기구로서 1938년부터 실시된 국민 정신 총동원 운동을 농촌 진흥 운동과 일치시켰다. 국민 정신 총동원 운동의 지역 연맹 중 정동부락 연맹(町洞部落聯盟)은 각 부락의 농촌진흥회와 사실상 조직을 같이 했다. 진흥회장이 부락 연맹 이사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직 체제의 중첩과 혼재를 정리하기 위해 1940년 10월 농촌 진흥 운동은 국민 정신 총동원 운동과 함께 국민 총력 운동으로 흡수⋅통합되었다.

▶ 관련자료

ㆍ농촌 진흥 운동(農村振興運動)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