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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서

제목 괘서
한자명 掛書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벽서(壁書)
별칭•이칭

[정의]

타인의 비방 또는 선동하는 내용을 담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붙인 익명의 글.

[내용]

괘서는 국가의 학정(虐政)이나 관리의 부정부패, 정국 운영에 반대하는 백성들이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었다. 괘서는 궐문이나 성문, 장시 등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에 부착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고, 이를 통해 파급 효과는 극대화되었다. 또한 괘서는 국가에 반역을 도모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활용되기도 했고, 타인을 모함하여 개인적 원한을 갚거나 민심의 혼란을 유도해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수단 등으로 활용되었다.

괘서 사건은 조선 후기에 급증하지만, 이미 9세기 신라의 진성왕(眞聖王) 대부터 괘서 사건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대중적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자신의 생각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기존 권위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오랜 역사를 통해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 크고 작은 괘서 사건이 있었는데,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여기에 대응하고자 했으나 괘서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괘서 사건 중에는 정국을 뒤흔든 사건들도 다수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1547년(명종 2)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수렴청정을 비판한 양재역(良才驛) 벽서 사건이 있는데, 이 괘서 사건은 많은 사림(士林)이 참화를 겪은 정미사화(丁未士禍)로 이어졌다. 1755년(영조 31)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이 내걸린 나주(羅州)의 괘서 사건은 소론의 과격한 세력을 일망타진시켰고, 그 결과 영조 대 탕평 정국의 변화를 야기했다.

18세기까지 괘서는 정치적 갈등 상황 때문에 발생한 경우가 다수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생활고에 시달린 백성의 불만이 표출되는 통로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의의]

괘서는 대중 매체가 없던 시대에 일종의 언론 역할을 담당했다. 괘서를 통해 익명의 인물들은 정부의 체제나 정책 및 관리의 부정부패 등을 비판하였다. 이것은 조선 후기 백성의 비판 의식을 키우는 데 일조하였다.

▶ 관련자료

ㆍ괘서(掛書)
ㆍ벽서(壁書)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