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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제목 성균관
한자명 成均館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반궁(泮宮), 문묘(文廟), 근궁(芹宮), 반관(泮館), 반수당(泮水堂), 반중(泮中), 수선지지(首善之地), 학궁(學宮), 현관(賢關)
별칭•이칭

[정의]

조선 시대 유학 교육을 위해 한양에 설립된 국립 고등 교육 기관.

[내용]

성균관은 고려 시대의 성균관을 계승한 것으로 1395년(태조 4)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현재의 위치인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明倫洞)에 건립되었다. 성균관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공자 및 유학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거행하는 것이며, 둘째는 인재들을 선발하여 유학을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과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공간이 구획되었고,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과 성균관 운영의 재원을 관리하는 양현고(養賢庫) 등의 부속 기관이 있었다.

성균관의 장관은 정3품 당상관인 대사성(大司成)이었고, 30명 이상의 관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학생 수는 건립 당시 100명이었다가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에 200명으로 증원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전란과 재정 궁핍으로 한때 75명까지 감축되었다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때 126명으로 회복되었다. 입학 자격은 생원시와 진사시를 통과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졌다. 그 외에는 4부 학당에서 생원진사시의 초시(初試)에 해당하는 승보시(陞補試)를 거쳐 입학하는 방법이 있었으며, 문음(門蔭)을 통해 입학하는 경우도 있었다. 본래는 모두 양현재에서 기거하며 학업에 정진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학생들이 기숙을 꺼려하였다. 그리하여 성균관에서 여러 가지 자체 시험을 치를 경우, 응시 자격을 원점 수를 기준으로 제한하였다. 원점(圓點)이란 학생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할 때 장부에 표시하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 쉽게 이해하자면 출석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성균관은 문과 급제를 대비한 교육 기관이었으므로 재학 기간은 특별히 정해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학령(學令)에 따라 생활하였는데, 이는 성균관의 학칙으로서 교과목, 시험, 성적 평가, 재생이 갖춰야 할 품행 등에 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유생들은 기숙사 생활에 소요되는 생활필수품 일체를 국가에서 지급받았으며, 관시(館試) 등의 특전이 있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성균관은 교육 기관으로서 위상을 이전처럼 유지하지는 못하였다. 성균관의 교육 재원인 학전(學田), 노비의 감소가 계속되었으며, 서원이 활성화되어 성균관의 과거 교육 기능을 상당 부분 맡게 되었다.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로 관제의 근대적 개혁과 더불어 기관의 명칭과 직제, 교육 과정 등이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1910년 한일병탄 후 경학원(經學院)으로 바뀌면서 교육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해방 후 성균관으로 환원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관련자료

ㆍ국학(國學)
ㆍ반궁(泮宮)
ㆍ성균관(成均館)
ㆍ수선지지(首善之地)
ㆍ현관(賢關)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