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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 은화

제목 각인 은화
한자명 刻印銀貨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대한제국, 일본
유의어 일본 은화
별칭•이칭

[정의]

1897년 일본의 금 본위제 시행으로 폐기되는 일본 은화에 은(銀)자를 새겨 조선에 유통시켰던 화폐.

[내용]

1894년(고종 31) 「신식 화폐 발행 장정」의 선포로 외국 화폐의 통용이 허가되었고,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인의 이주 증가, 무역 확대 등으로 일본 은화의 국내 유통량이 크게 증대되었다. 당시 일본 은화 1엔은 5냥 은화와 같은 가치를 갖는 화폐로 통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1897년 일본이 금 본위제를 채택하고, 국내에서 유통되던 일본 은화를 환수하자 국내 시장에서는 화폐 부족 현상이 극심하게 발생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일본 은화의 환수를 정지시키고, 1엔 은화에 ‘은(銀)’ 자를 새겨 넣어 5냥 은화와 동일한 가치로 유통시켰다. 일본에서 폐기될 일본 은화가 각인(刻印)을 거쳐 국내 통화로 사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새롭게 부임한 러시아인 탁지부 고문 알렉세예프(Karl Alexeiev)는 일본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서 각인 은화의 통용을 금지시켰고, 이로 인해 국내에서 유통되는 일본 은화의 1/3이 일본으로 환수되면서 국내 시장에서는 다시 화폐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이에 정부는 일본 정부와 협상하여 각인 은화의 통용을 재개시켰다. 각인 은화의 통용 금지와 재개가 반복되면서 각인 은화의 신용은 크게 하락했다.

한편, 1895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臺灣, 타이완)에서는 일본 은화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되었고, 중국 상인은 환차익을 보기 위해 국내 각인 은화를 대만에 유통시켰다. 이로 인해 국내 은화 유통량이 더욱 감소했고, 이에 조선 정부는 백동화를 대량 주조하기 시작했다.

[의의]

각인 은화는 대한제국 화폐 정책의 혼란상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아시아 지역의 은화 가치 변동이 국내 은화 유통에 영향을 미쳤던 상황을 알려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