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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험한 산을 빠르게 헤치고 걷는 한 남성.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인의 명약으로 소문난 산삼이었군요. 이렇듯 삼은 산에서 캐기도 하지만 밭에서 재배하기도 하는데요.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언제부터 삼을 재배하게 되었을까요?

우리 역사에서 언제부터 삼을 재배하게 되었을까?

다양한 약재를 거래하는 이곳은 대구약령시입니다. 대구약령시는 조선 후기부터 다양한 약재를 판매했던 곳인데요. 특히 한약재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삼은 예나 지금이나 많이 유통되는 약재라고 합니다.

천연의 산삼과 재배한 인삼을 구분하는 요즘과 달리 선조들은 산삼 역시 인삼으로 불렀는데요.

(인삼은) 오장(의 기운)을 더해주고 정신을 안정시키며 … 눈을 밝게 하고 장과 위의 냉증을 치료한다. 기억력도 좋아지게 하며, 오랫동안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장수한다.

- 『향약집성방』

삼의 효능은 일찍이 조선 세종 때 간행된 의약서 『향약집성방』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방면에 효능을 가진 인삼. 이웃 나라까지 알려져 있었는데요.
그래서일까요?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때 산삼을 선물로 준비했다고 합니다.

인삼이 우리 땅에서만 나는 작물이라 유명했던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 땅에서 나는 인삼의 품질이 다른 나라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유명했던 건데요.

“우리 산삼의 품질이 좋은 이유는 지형과 환경, 토양과 기후 이런 자연환경이 산삼이 자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갖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송준태 관장 / 인삼박물관

공안(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한 장부)에 있는 수량은 평안도와 황해도가 합계 9백 60근이오니…

- 『세종실록』 세종 17년(1435) 6월 8일

조선 세종 때는 전국 329군현 가운데 1/3이 넘는 112개의 고을에서 인삼을 공납 받을 정도였고요. 평안도와 황해도만 하더라도 1년에 약 1,000근을 공납했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1년에 진헌하는 인삼이 1천 9백여 근이다.

- 『선조실록』 선조 34년(1601) 3월 17일

그리고 선조 때는 전국적으로 1,900여 근을 진헌했다고 하는데요. 조선 후기, 해외 무역의 확대와 국내의 인삼 선호로 인삼이 부족해지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밭에서 재배한 가삼입니다.

“조선 후기 때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에 가삼 재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인삼재배를 밭에서 하게 됨으로써 공납에 필요한 수요와 해외 무역으로 거래되는 수요를 충분히 감당하게 됐습니다.”

장명환 연구사 / 영주 인삼연구소

산삼이 귀해져서 인삼을 재배하는 것이 풍속이 됐다.

- 『승정원일기』 정조 14년(1790) 8월 20일

조선 정조 때는 인삼 재배가 하나의 풍속이 됐습니다. 가삼은 인삼 부족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방책이었는데요. 결국 가삼으로 인해 인삼 무역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홍삼을 만들게 된 이유는?

인삼은 가공 방법에 따라 수삼, 건삼, 홍삼 등 부르는 명칭이 다양한데요.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인삼을 가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갓 캐낸 상태의 인삼, 바로 수삼이라고 하는데요. 수삼은 수분 함량이 높아서 곰팡이가 쉽게 피는데요. 그래서 일주일 이상을 보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껍질을 살짝 벗겨내서 건조한 건삼을 만들었는데요. 하지만 건삼은 장기 보존이 가능했지만 바로 운송과정에서 쉽게 부서진다는 단점이 있었는데요.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우리에게 친숙한 홍삼입니다.

인삼을 24시간 동안 찐 후에, 숯으로 고온이 유지되는 방에서 부분적으로 말린다. 최종적으로 태양 빛에 뿌리를 말리는 방법이 효과가 있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고종 때 조선을 네 차례나 방문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답사기에 당시 홍삼을 만드는 방법이 나와 있는데요.
비교적 오랜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홍삼은 수삼, 건삼과 어떻게 달랐을까요?

“홍삼은 밭에서 6년 재배한 뒤에 캐면, 맨 처음 삼을 닦는 세삼 공정이 있고, 그다음 증삼, 찌는 공정이 있고, 세 번째 말리는 건조 공정이 있습니다.”

이용진 공장장 / 김포파주 인삼농협, 전 전매청 공장장

이처럼 인삼을 쪄서 말린 홍삼은 수분 함량이 낮고 단단하기 때문에 곰팡이가 쉽게 생기지도 않고, 부서질 염려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관과 이동이 쉬웠다고 하는데요.

18세기 이후 재배한 인삼인 가삼 덕에 인삼의 공급량이 증가하면서 새로운 보관법으로 탄생한 홍삼.
유통기한이 늘어난 홍삼 덕분에 19세기 이후 중국에 수출되는 인삼은 대부분 홍삼이었다고 합니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인삼을 챙긴 이유는?

일본인의 풍속에 병이 생기면 반드시 인삼을 쓰니, 만약 무역을 막으면 죽을 각오로 다투어 사단이 일어날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교역을 허락하였다.

- 이익 『성호사설』

이익의 성호사설을 보면, 일본인들이 인삼을 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다툴 정도로 인삼을 명약으로 여겼다는데요. 이렇듯 이웃 나라까지 퍼진 효능 덕분에, 인삼은 국제 외교에서 중요한 예물로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당시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한 인삼은 개인적으로 무역을 할 수 없었는데요. 하지만,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과 수행원들은 예외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사행원의 정관 30여 명이 1인당 80근의 인삼을 중국에 가져갈 수 있었는데요. 인삼 80근이 은 2,000냥의 가치를 지녔다고 하니, 인삼은 엄청나게 값비싼 물품이었던 것이지요.

“소량으로도 많은 양의 금전 가치를 지닌 인삼을 가지고 가서, 현지에서 현금으로 조달해서 유지 체제 경비를 충당했습니다.”

송준태 관장 / 영주 인삼박물관

홍삼이 등장하면서 인삼 무역의 새로운 장이 열렸는데요. 이때 홍삼 무역으로 소문난 지역이 있습니다. 개성인데요.

많은 자본을 가진 부유한 개성 상인들이 가삼 재배에 뛰어들면서 조선 인삼의 대부분이 개성 지역에서 재배됐고요. 특히 19세기에 들어 홍삼 제조 독점권을 따내면서 개성 인삼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선조들이 지켜온 인삼의 명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는데요. 과거부터 현대까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우리의 인삼.
선조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빚어낸 저력입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조선후기 인삼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밭에서 가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2. 인삼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쪄서 말린 홍삼이 만들어졌다.
3. 인삼은 국제무역에서 널리 이용되었으며 개성상인이 유명했다.

해설

1. 인삼 재배의 기원

고려인삼(高麗人蔘)이라고 불리며, 가공하여 만든 홍삼(紅蔘)이 서양에도 널리 알려진 인삼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약재 및 상품이다. 인삼은 재배방식이나 가공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불리는데, 자생 혹은 재배방식에 따라서는 산삼과 인삼으로 구분된다. 인공으로 재배된 삼을 뜻하는 인삼의 기원은 자생하는 산삼(山蔘)에서 비롯하였고, 산삼이야말로 본래 인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인공적으로 재배한 삼인 인삼은 가삼(家蔘)이라고도 하였는데,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인삼과 산삼을 구분하지 않고 대부분 인삼이라고 불렀다.

조선 세종 때에 편찬된 『향약집성방』에서 설명한 것처럼 약재로써 인삼의 뛰어난 효과는 고대부터 동아시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중국·일본 등과의 국제관계에서도 중시되는 예물이었으므로, 국가에서는 인삼의 채취와 유통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가령 조선의 조세제도인 조(租)·용(庸)·조(調)에서, 인삼은 조(調)에 해당하고 임토작공(任土作貢, 지역산품)과 본색직납(本色直納, 현물납)이라는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다. 그리고 인삼의 자생 현황과 공납의 실태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전국 329개 군현 가운데 1/3이 넘는 112개 고을에서 인삼이 산출·공납되고 있었다. 대부분 백두대간 산지 전역에 걸쳐 분포하였으며, 공납하는 인삼 총액은 16세기 말까지 1년에 대략 1,000여근에서 1,900여근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삼의 국내 소비와 대외무역이 확대되면서 자연산 인삼의 채취가 어려워지자, 조선후기에 인삼의 재배가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인삼 재배가 처음 시작된 곳은 경상도로 보이는데, 18세기 초반 숙종 때에 영남에서 종삼(種蔘)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산에서 재배하다가 점차 밭에서 키우는 방법으로 점차 전환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인삼재배가 풍속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늘어났다. 또한 인삼재배의 이익이 커지면서 정조는 화성을 육성하기 위해 인삼재배를 계획할 정도였다.

아울러 인삼재배를 학문적으로 정리한 서적들도 계속 간행되었다. 1793년(정조17) 유득공(柳得恭)의 『고예당필기(古芸堂筆記)』를 시작으로, 1798년(정조22)에는 서호수(徐浩修)의 『해동농서(海東農書)』, 1800(정조24)년 이학규(李學逵)의 『삼서(蔘書)』가 간행·출판되었다. 19세기에도 서영보(徐榮輔)의 「종삼보(種蔘譜)」, 성해응(成海應)의 「종삼보(種蔘譜)」와 「속종삼보(續種蔘譜)」,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 인삼재배 전문서적이 차례로 등장하였다.

2. 홍삼과 개성상인

인삼은 재배방식 외에 가공형태에 따라서 다양하게 구분된다. 수확한 이후에 별도로 가공하지 않은 상태의 생삼을 수삼(水蔘)이라고 하는데, 장기간 보관이 어려운 까닭에 다양하게 가공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수삼의 껍질을 살짝 벗겨내고 그대로 햇빛에 자연 건조한 백삼, 혹은 건삼(乾蔘)이 등장하였는데, 충격에 부서지기 쉬운 단점이 있었다. 이에 껍질째 증기로 쪄서 말려, 장기간 파손 없이 보관할 수 있는 홍삼(紅蔘)이 개발되었다.

홍삼 가공의 시작은 분명하지 않지만 삼을 익히는 가공법의 기원은 오래되었다. 1123년(인종원년) 송나라의 사신 일행으로 고려의 수도 개성을 방문했던 서긍(徐兢)이 남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삼을 쪄서 익힌 숙삼(熟蔘)이 등장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명나라 원군에 동행한 중국 상인이 전수했다는 파삼(把蔘)도 있는데,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인삼을 삶아서 함께 묶어 건조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가삼의 재배로 인삼 공급이 증가하면서, 보관을 위한 새로운 가공법이 필요해지면서 등장한 것이 홍삼제조법이었다.

홍삼의 제조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수삼의 잔뿌리를 제거한 다음 솔로 흙을 떨어내고, 다시 물로 깨끗이 씻는다. 세척이 끝난 삼을 시루에 넣어, 끓는 가마솥 위에서 1시간 30분 내외로 삼을 충분히 익힌다. 인삼이 다 쪄지면 시루에서 꺼내어 건조하는데, 열기를 식히고 나서 6~7일 동안 자연 건조시키거나, 쪄진 삼의 열을 식히지 않고 바로 건조로에 넣어 이틀 정도 건조시킨다. 이렇게 하면 수삼 1근을 가지고 24~34% 내외의 홍삼을 제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후기 가삼의 재배와 홍삼 제조를 바탕으로 개성상인(松商)이 크게 성장하였다. 그들은 이미 축적한 자본과 신용만으로 자금을 융통하는 시변제(時變制)를 바탕으로 인삼밭인 삼포(蔘圃) 경영을 기업적인 형태로까지 발전시켰다. 아울러 홍삼 제조공장인 증포소를 통해 홍삼 제조를 독점하면서 홍삼의 대외무역에서 얻은 자본을 인삼재배에 재투자했다. 그 결과 1896년(고종33) 개성의 삼포 경작비율은 전국의 47%를 점유했으며, 금천, 장단, 풍덕 등을 포함하면 무려 92%에 이르렀다. 사실상 조선의 인삼 대부분이 개성에서 나온다고 할 정도였다.

3. 인삼무역의 전개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인삼은 고대부터 중요한 외교 예물로 사용되었는데, 백제 무령왕이 양나라 무제에게 예물로 인삼을 보냈으며, 신라에서도 여러 차례 당나라에 인삼을 예물로 바쳤다. 이후로도 인삼은 ‘사대교린(事大交隣)’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외교 틀 안에서, 사대와 교린을 각기 실현하는 주요 예물이었다. 즉 중국에 사대하는 주요 예물이 인삼이었으며, 거꾸로 일본에 교린의 예물로 이용한 것도 인삼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과의 외교 및 경제적 상황에 따라 예물·무역으로 사용하는 인삼의 양과 교역 방식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초기의 국제무역은 국가에서 파견하는 외교사절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조공무역이 주를 이루었다.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가 불안정했던 초기인 세종 대에는 800근 전후한 인삼이 명나라로 보내졌는데, 외교가 안정되면서 성종 대에는 대략 300근을 상회하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조공무역의 비중은 축소되었지만 사무역이 활성화되면서 대중국 인삼의 무역량은 17세기 초반까지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건국되면서 인삼의 주요 교역국이 점차 일본으로 바뀌었다.

18세기를 전후하여 일본과의 인삼교역이 증가하면서, 한국·중국·일본의 삼각무역이 형성·확대되었다. 즉 일본으로 수출되는 인삼의 결재대금으로 받아온 은이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조선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수입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대일무역이 급증하자 조선에서 인삼의 채취량도 급격하게 감소하였고, 한편 일본에서는 인삼의 수입으로 인해 많은 양의 은이 유출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특히 재정부족이 심화되면서 일본에서는 인삼의 국산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일본으로의 조선 인삼수출은 침체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인삼재배를 통해 생산량을 확대하는 한편, 늘어난 인삼을 홍삼화하여 대중국 수출을 재개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해 나갔다. 1797년(정조21) 삼포절목(蔘包節目)을 발효하여, 역관들의 팔포무역에 가삼을 가공한 홍삼을 추가시킴으로써 인삼교역과 세수를 확대하였다. 한편 1851년(철종2) 만상이 교역권을 독점하는 대신 개성이 홍삼을 제조하는 증포소로 지정되면서, 개성상인은 홍삼 제조를 독점 공급하고 이를 통해서 조선말기 가장 유력한 상단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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