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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우리 문화와 예술에 관련된 수많은 주제들이 언급되고 있으나 대부분 시대별로 간략히 서술되어 그 개념과 변천 과정, 성격 등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영상 문화·예술이야기>는 한국사 속 문화·예술 분야의 주요 주제별로 그 흐름과 변천 과정, 특징과 성격 등을 전문가의 해설을 기반으로 동영상 자료로 제작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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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2019년 런던의 한 패션쇼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에드워드 크러칠리의 쇼에 익숙한 모자를 쓴 모델이 등장하는데요. 시선을 사로잡은 모자는 바로 조선의 갓입니다. 디자이너는 갓의 심플함과 가벼움, 강렬한 실루엣에 아름다움을 느꼈다는데요. 그런데, 백여 년 전, 이 멋을 먼저 알아본 이들이 있습니다. 모자는 당시 서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패션 아이템이었는데, 왜 그들의 눈에 조선의 모자가 독특해 보였을까요?

남다른 개성으로 시선을 사로잡은 조선의 모자
단순한 패션을 넘어 다양한 의미를 지닌 조선의 멋을 소개합니다.

외국인의 눈에 조선인의 모자가 독특했던 이유는?

고운 비단옷을 차려입었지만, 뭔가 허전해 보이지 않나요? 당시 조선에서는 맨 상투 차림을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겨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요.

조선이 모자의 왕국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모자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
신분에 따라, 장소에 따라 쓰는 모자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지폐만 봐도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요. 퇴계 이황은 유학자들이 쓰는 복건을 썼고, 율곡 이이는 양반들이 집안에서 쓰는 정자관을 썼죠. 세종대왕은 왕이 업무를 볼 때 쓰는 익선관을 쓰고 있고요.

모자만 보고도 이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지, 집에서 쉬고 있는 것인지, 외출하는 것인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중 조선 후기 양반이 쓰지 않는 모자는 무엇일까요?
정답은 패랭이입니다.

서민들도 신분에 맞는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요. 이마저 마련할 형편이 안 되면, 맨 상투 차림으로 다니기도 했다네요. 여성은 예복에 갖춰 쓰는 족두리나, 화관 등도 있었지 만, 왕실이나 양반 계층에서 사용한 너울과 일반 부녀자가 사용한 소매가 있는 장옷처럼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된 쓰개도 있었습니다.

늦은 밤 남녀의 만남을 그린 신윤복의 그림에도 쓰개치마를 뒤집어쓴 여성이 나오죠. 이렇듯 각양각색의 모자를 쓰고 다녀서 외국인의 눈에 특별해 보였던 것일까요?

“외국에서도 모자를 평소에 많이 써서 잘 알고 있었을 텐데 한국에 왔더니 계절별로 다르기도 하고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 모자를 다르게 다양하게 써서 한국이 특이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최은수 /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조선 남성 사이에서 유행했던 패션 아이템은?

바른 옷차림에서 바른 정신이 나온다고 생각한 조선 시대 선비들
많은 모자 가운데서 선비 정신을 대표하는 모자가 있는데요. 바로 갓입니다.

외투와 신발은 벗어도 머리 위에 머무르니 평생을 붙어 다니는 영원한 검은 후광이다. - 퍼시벌 로웰,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ӧ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86년

비가 오면 갓 위에 갈모를 겹쳐 쓰고, 날씨가 추우면 먼저 휘항을 쓰고, 그 위에 갓을 쓴 선비들. 선비들이 갓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선비들에게 있어서 의관정제란 삶의 한 부분이고 선비들의 자긍심, 품격,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오창식 / 자운서원 국장

갓을 쓰는 방법에서도 바른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는데요. 우선 상투를 틀어 그 위에 상투관을 올리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망건을 두른 뒤 머리에 맞게 조절합니다. 이제 탕건을 쓰고 그 위에 갓을 쓰는데요.

여기서 포인트!
갓은 이마를 덮고 쓰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얹는 느낌으로 쓰는 것이 바른 착장법입니다.

원래 갓은 대나무로 만든 죽세공예품이었습니다. 대나무로 대우와 양태를 따로 만들어 조립하였는데요. 시간이 흐른 뒤에도, 양태는 여전히 대나무로 만들었지만, 왜 대나무 대신 말총을 쓰기 시작했을까요?

조선 시대 집의 문은 낮고 좁아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갈 때 고개를 숙이면서 대나무로 만든 대우가 깨지거나 부러지곤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조선 남성들이 자주 썼던 갓은 편의에 따라 재료도 변하고, 유행에 따라 모양도 달라졌는데요.

“조선 초기는 총모자가 좀 둥근 형태, 양태가 대략 45cm~50cm 정도. 성인 남성 어깨가 조금 넘는 정도의 크기였는데요. (여기서) 점차 더 커져서 남아있는 유물에서 보면 차양이 61cm 이상으로 어깨너비보다 넓은 큰 갓들도 있었고요.” 박형박 / 국가무형문화재 갓일 이수자

당시 선비들도 대우와 양태 모양의 유행을 쫓으며 패션에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모자가 너무 높고 양태가 너무 넓어 문을 드나들 때 방해가 되니, 그 제도가 어찌 매우 해괴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는 갓의 양태가 너무 넓은 자는 법부로 하여금 금지시키도록 하라. - 『효종실록』 효종 8년(1657) 1월 10일

심지어 갓을 크게 만드는 것이 유행하면서 지나치게 큰 갓을 금지하는 법령을 시행하기도 했다는데요.

다만 우리 조선에만 갓끈이 있으니, … 소용이 없는 물건을 비싼 값을 쳐서 지나치게 사들이고 있으니, 그 제도를 폐지하기를 청합니다. - 『중종실록』 중종 3년(1508) 1월 8일

그리고 지나치게 화려하고 비싼 갓 장신구들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보관하는 갓집이 따로 있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은 갓. 그렇다면 선비의 필수품, 갓의 가격은 얼마였을까요?

“재료인 말총, 대나무는 미리 준비해서 실처럼 가늘게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양태와 총모자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양태와 총모자를 연결하는 입자장이 있었는데 (많은) 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선 시대에도 구매 가격을 살펴보면 관리의 월급으로 봤을 때, 한 달 반의 월급이 들었다고 하고” 최은수 /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갓이 비싼 이유는 사람의 손으로 한땀 한땀 만들기 때문인데요. 대나무와 말총으로 하나의 갓을 만드는데 보통 한 달 이상 걸렸다고 합니다. 검게만 보이는 갓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인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섬세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데요. 하지만 조선 선비의 모자로 불리던 갓은 1895년 단발령의 실시로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갓을 쓰는 사람이 줄자 자연스럽게 갓을 만드는 장인도 줄어들었는데요.

“제가 (갓을 만든지) 4대 째인데요 제가 16세부터 시작해서 지금 (경력이) 60년이 넘어요. (현재 갓을 만드는 장인은) 입자장에서는 두 분, 양태장은 한 분, 총모자장 한 분 (4명 남았죠).” 박창영 / 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보유자

수백 년 전의 모자가 다시금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전통을 묵묵히 지켜온 장인들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단순한 패션 아이템이 아닌 시대의 정신을 상징하는 갓, 바른 마음가짐을 소중히 여긴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조선시대 많은 사람들이 모자를 쓴 이유는 예의 때문이다.
2. 모자를 보면 쓴 사람의 신분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3. 1895년 단발령 이후 갓을 쓰는 문화가 쇠퇴했다.

해설

근래 전세계인들이 갑자기 우리 조선의 모자에 주목하고 있다. 그 이유는 2019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킹덤’을 비롯한 K-드라마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K-좀비들이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드라마 속 배우들이 쓴 모자에 외국인들이 열광하게 된 것이다. 드라마에서 시작된 온라인 상 갓의 인기는 드라마 밖 오프라인에서도 갓을 구매하고 수집하는 열풍으로까지 번지는 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외국인들이 조선의 모자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19세기 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외국인들 또한 조선의 모자를 주목하였다. 의관 정제(衣冠整齊)를 중시하였던 조선의 남자들은 잠을 잘 때 이외에는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모자를 착용하였다. 그만큼 갓을 비롯한 조선의 모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고유성을 지닌 표상물이고, 조선은 모자의 나라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선 조선을 대표하는 모자 중에서 특히 갓을 대상으로 하여, 먼저 남성 패션의 중심으로서 갓의 역사적 변천을 살펴보자. 갓은 시기별로 형태와 모양이 변화되면서 조선 남성들의 패션을 선도하였다. 갓은 대우와 양태가 일체형인 패랭이 모자에 그 원형을 두고 있다. 이것은 조선 초기 15세기의 갓에서 확인되는데, 김시습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대우부터 양태까지 둥그스름한 일체형이다. 16세기가 되면 이현보나 김진의 초상화에 그려진 갓에서 볼 수 있듯이 대우와 양태가 분리되기 시작하여, 대우는 봉긋하게 높아지고 양태는 별도로 제작된 형태로 변화되었다. 이후 17세기부터 18세기 풍속화에 그려진 선비들의 갓을 보면 대우가 낮고 꼭대기가 편평하고 옆 모습은 넓은 사다리꼴이며 양태가 넓어지면서 둥글게 트집을 잡힌 모습이다. 19세기 말 국가적으로 갓의 모습은 실용적으로 개량하여 대우가 낮고 양태도 좁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갓은 시대가 내려가면서 대우와 양태의 형태가 머리에 푹 눌러 뒤집어 쓰는 모자형(帽子形)이 아닌 머리에 얹는 관형(冠形)으로 개선되었고, 전체적으로 원형과 사다리꼴, 직선 및 곡선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형태와 쓰임을 갖게 되었다.

성종 때 편찬한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시대 법전에 의하면 선비들은 대나무와 말총을 주재료로 삼은 초립이나 50죽 혹은 마미립을 사용하였고 먹칠과 흑칠을 한 흑립을 착용하였다. 특히 흑립은 원래 대우와 양태를 모두 대나무를 사용하여 제작하였는데, 이후 대우와 양태가 분리되면서 대우를 제작하는 재료를 대나무 대신 말총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다음 갓의 형태를 보완하고 표면 질감을 미화하기 위해 명주실이나 생초 및 명주베 등을 다시 한번 올려 갓만의 독창적인 특징을 갖게 된다. 그것이 갓의 명칭이 되면서 종류가 다양해졌다. 싸개로 대우나 양태 위에 대올[竹絲]을 올린 것이 죽사립(竹絲笠)이고, 대우나 양태 위 싸개로 명주베[布]를 올린 것이 포립(布笠)이며, 얇은 비단[紗]을 올린 사립(紗笠)이 그것이다. 죽대우와 죽양태 위에 명주실[眞絲, 蜀紗]를 올린 진사립(眞絲笠), 말총대우와 죽양태에 명주실을 올려 싼 음양사립(陰陽絲笠), 붉은 칠을 한 대나무로 대우와 양태를 만든 위에 붉은 색으로 염색하였기에 주립(朱笠)이다. 이 주립은 색상 면으로 보면 주색보다 짙어 자립(紫笠)으로도 불렀고, 옻칠을 했기 때문에 칠립(漆笠)이라고도 부르며, 말 갈기털로 만들어 종립(鬉笠)이나 붉은 말총갓[紫騣笠]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갓을 제작하는 재료는 대우에 말총으로 바뀌기도 하고, 대우와 양태를 싸는 재료를 대올이나 명주실이나 명주천 및 말총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하여 여러 종류로 다채롭게 발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갓 제작 기술은 국가의 보호 아래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19세기 말 단발령 이후 갓을 착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그것을 제작하는 장인들도 점차 사라지게 되자, 문화재청에서는 갓과 관련된 망건과 탕건 및 갓 등의 각종 모자를 제작하는 전통 공예기술을 지닌 장인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머리카락을 간추리는 망건을 만드는 망건장, 실내용 모자인 탕건을 만드는 탕건장, 대우를 만드는 총모자장, 양태를 만드는 양태장, 갓을 만드는 입자장 등이 그들이다. 이들 장인들은 조선시대 이래 갓을 비롯한 모자를 계속 전통적인 재료와 기술로 제작하여 가장 한국적인 문화유산을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도록

  • 온양민속박물관, 1988, 『조선시대 관모』
  •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 국립중앙박물관, 2002, 『조선시대 풍속화』
  • 국립제주박물관, 2002, 『제주의 삶, 제주의 아름다움』
  • 국립민속박물관, 2002, 『한국 복식 2천년』
  • 嶺南文化財硏究院, 2011, 『머리에서 발끝까지』
  • 통영시립박물관, 2015, 『통영, 명품으로 빛나다』
  • 국립민속박물관·천안박물관, 2017, 『모자, 품격의 완성』
  • 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 국립대구박물관, 2021, 『선비의 멋, 갓』

단행본

  • 장경희, 2001,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화산문화
  • 장경희, 2000,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화산문화
  • 장경희, 2001, 『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 망건장』, 화산문화
  • 장경희, 2006, 『조선시대 관모공예사 연구』, 경인문화
  • 국립중앙박물관, 2017,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인이 본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자료총서17
  • 반주원, 2017, 『우리가 미처 몰랐던 조선생활사, 조선시대 살아보기』, 미래의창

논문

  • 강순제, 1977, 「한국 입제의 변천에 관한 연구」, 『복식』 1, 한국복식학회
  • 진미희·권영숙, 1999, 「한국 고대 관모에 관한 연구」, 『전통복식』 1, 한국전통복식연구소
  • 장경희, 2019, 「조선후기 한중 방한모자의 비교」, 『文化와藝術硏究』14호, 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
  • 장경희, 2006, 「조선,청 간의 모자무역과 제작실태 연구」, 『사총』62호, 역사학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