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명 | 기획 | 자료해설 자문 | 연출 | 시나리오 구성 | 기획 제작 | 구축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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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식 | 김형우 이혁로 이연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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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 김재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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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 | 권오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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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 | 서정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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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불화 | 김정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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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 조재모 | |||||
세종대 천문기기와 역법 | 정성희 | |||||
제지술과 인쇄술 | 이재정 | |||||
통신사행렬도 | 정은주 | 최광석 | 김미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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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 김기원 | 김자경 | 스토리라인 | 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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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 강문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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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직 | 백영미 | |||||
탈놀이 | 허용호 | 윤종원, 유환수 | 임승연 | |||
궁중무용 | 손선숙 | 문현성 | ||||
민화 | 유미나 | 문현성 | 나누리 | |||
어보 | 성인근 | |||||
읍성 | 신재호 이주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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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기 | 스튜디오바카 | 2023 |
혼례 | 김연수 | |||||
질그릇 | 한혜선 | 지해 손희창 |
홍종화 | |||
탱화 | 유경희 | |||||
농악 | 양옥경 | |||||
해녀 | 오상학 | 지해 김정동 |
해녀라고 하면 여러분은 제일 먼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자식들을 억척스럽게 키워낸 어머니와 할머니. 싱싱한 해산물을 인심 좋게 내어주며 짓는 어촌의 순박한 미소. 돌고래들 사이로 무자맥질을 하며 푸른 바다속을 누비는 낭만적인 풍경. 그런데 말이죠, 생각해 보면 뭔가 건너뛴 듯하지 않나요? 애초에 해녀라는 명칭은 물질하는 여성이라는 직업 그 자체를 가리키니까요.
해녀의 물질
해녀는 별도의 산소 공급 장치 없이 바닷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캐는 여성을 말합니다. 해녀들의 작업은 물질이라고 부르는데요, 오랜 시간을 거쳐 숙련되는 전문가의 영역입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물질을 반복하면서 바다 어장의 지형과 해산물의 서식처를 경험으로 익히며 물때와 바람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통해 물질 나가는 시기를 결정합니다.
해녀는 숙련 정도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뉘는데요, 실력이 출중한 상군 해녀들은 15미터 넘게 잠수하여 2분 이상을 버티다 나오기도 합니다. 잠수를 마치고 물 위에 나온 해녀들은 휘파람을 부는 것 같은 특유의 숨소리를 내는데요, 이를 숨비소리라고 합니다. 숨비소리는 잠수 중 몸속에 쌓인 이산화탄소를 토해내기 위해 해녀들이 반드시 터득해야 하는 기술입니다.
그렇다면 해녀들은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물질을 할까요? 맨몸으로 작업하는 해녀들에게 둥그런 공 모양의 테왁은 흔히 생명줄에 비유되는 도구입니다. 작업장까지 헤엄쳐 갈 때도, 물 위로 올라와 잠시 쉴 때도 테왁 하나에 몸을 의지하기 때문인데요, 채취한 해산물을 담은 망사리 역시 이 테왁에 걸어둡니다. 해녀들은 채취할 해산물에 따라 각각 다른 종류의 도구를 사용해 작업합니다. 전복을 딸 때는 빗창, 미역이나 모자반 등 해조류를 벨 때는 종게 호미, 고기를 잡을 때는 작살 모양의 소살을 사용합니다.
해녀들에게 도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잠수복입니다. 잠수복은 크게 고무 잠수복 도입의 전과 후로 나누어집니다. 70년대 이전까지 해녀들은 무명천으로 만든 잠수복을 입고 바다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외국에서 고무 잠수복이 들어오고 발에는 오리발이라 불리는 물갈퀴를 신게 되었는데요, 고무잠수복의 보온성 덕분에 물질 시간을 늘릴 수 있었고 해녀들의 해산물 채취량도 크게 증가하게 됩니다.
해녀 공동체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제주 바다의 풍요로움은 해양 자원 관리를 위한 해녀 공동체의 노력 덕분입니다. 해녀 공동체는 각 마을의 어촌계에 소속되어 마을의 바다 어장을 철저히 관리하는데요, 연간 지정된 생산량에 따라 수확을 조절하며 각 어촌계별로 해양 자원을 관리하기 위해 포획 및 채취 금지 사항을 지정하여 물질을 통제합니다. 또한 정기적으로 바다 어장을 청소하고 조간대의 바위 면에 붙은 석회조류를 제거하는 갯닦이 활동을 통해 우뭇가사리나 톳 등의 해조류가 잘 자랄 수 있도록 관리합니다.
과거 해안가 불턱은 옷을 갈아입고 언 몸을 녹이는 장소이자 물질 기술과 지식을 전수 받고 해녀로서의 의무를 익히는 중요한 공간이었는데요, 현대식 탈의장이 생긴 후 불턱은 거의 사라졌지만 불턱 문화에서 비롯된 존경과 배려, 인정과 응원의 문화는 해녀 공동체 곳곳에 살아 있습니다.
해녀들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물속에서 유사시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동료의 행동을 주시하며 서로 가까운 곳에서 물질을 하며 망사리를 채우지 못한 해녀에게 자신의 수확물을 나눠줍니다. 또한 수심이 얕은 일정 바다를 ‘할망바다’로 지정하여 나이가 들어 기량이 떨어지는 해녀들이 작업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줍니다.
해녀의 역사
해녀의 발상지인 제주도는 3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탐라로 불리던 사실상의 고대 독립 국가였습니다. 탐라는 동아시아 바다를 무대로 주변국과 활발한 교역과 외교를 펼쳐나갔는데요, 특히 탐라는 특산품으로 말린 전복인 탐라복이 유명하였습니다. 8세기 중반 일본 헤이조 궁 출토 목간에서 탐라복에 대한 내용이 발견되며 제주 해녀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확인되었습니다.
해녀에 대한 최초의 공식기록은 1629년 이건이 기록한 제주풍토기입니다.
‘미역을 캐는 여자를 잠녀라고 한다. 그들은 2월 이후부터 5월 이전까지 바다에 들어가서 미역을 캔다.’ - 이건, 『규창집』 「제주풍토기」
조선시대 제주민들은 때마다 생산되는 제주의 특산물을 진상하는 공납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여기에 전복과 미역 같은 해산물을 진상하는 일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중 조정에 진상할 전복을 전문적으로 채취하는 남성들을 포작이라 불렀는데 고된 노역을 견디다 못해 제주 바깥으로 도망쳐 나가는 현상이 빈번히 발생하였습니다.
‘제주에서 진상하는 전복의 수량이 많은데다, 관리들이 사욕을 채우는 것이 또한 몇 배나 된다. 포작인들은 그 일을 견디다 못해 도망가고 익사하는 자가 열에 일곱, 여덞이다.’ - 김상헌, 『남사록』, 1602년
1629년, 결국 조정에서는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리고 이 법은 약 200년간 시행됩니다.
‘제주(濟州)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육지의 고을에 옮겨 사는 관계로 세 고을의 군액(軍額)이 감소되자, 비국이 도민(島民)의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21권, 인조 7년 8월 13일
그리고 전복과 미역의 진상은 급격히 줄어든 제주 남성을 대신하여 전적으로 여성들에게 부과됩니다.
“진상용 말린 전복은 전복 잡는 해녀[潛女] 90명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지워 왔으나 늙고 병들어 대부분이 담당할 수 없게 됐다. 미역 캐는 해녀는 많게는 800명에 이르는데 (중략) 미역 담당 해녀들에게 전복 따기 일을 나누어 정해 주었다.” - 이익태, 『지영록』
출향해녀
제주 해녀들이 본격적으로 섬 밖으로 진출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입니다. 1883년 조일통상장정 체결 이후 일명 ‘머구리 배’라고 부르는 일본 잠수기선 업자들이 제주 바다에서 가죽 잠수복을 입고 산소 호스를 연결해 전복을 대량 채취하기 시작했고 일본의 해조류 상인들까지 제주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며 제주도 해녀 어장은 급속히 황폐화 됩니다.
1895년경부터는 육지의 해조류 상인들이 제주 해녀들을 모집하며 생계를 위한 제주 해녀의 한반도 출향 조직이 형성되게 됩니다. 출향해녀들이 건너간 장소는 국내 동해안과 남해안부터 중국 칭다오, 다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13개 지역에 이르는데요, 특히 일본 해녀의 빈자리를 제주 해녀가 채우면서 1932년에는 천 팔백여 명에 달하는 해녀가 일본 어장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에필로그]
1960년대에 이르러 제주의 해녀는 2만 3천 명을 넘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 해녀의 수는 꾸준히 줄어들었습니다. 2022년 말 기준으로 제주 해녀는 3천여 명만 남아있습니다. 급속하게 사라져가는 해녀와 물질의 보존이 중요한 이유는 해녀 문화가 제주의 다양한 전통 문화유산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고도로 훈련된 여성 직업인이면서, 동시에 제주와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해녀 문화, 이제 우리의 관심과 공감이 더욱 중요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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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국사편찬위원회
제작 : 스튜디오 바카
자문 : 오상학
검수 : 좌혜경, 명재림, 서명원
수어통역 : 최황순
촬영·자료 협조: 국립무형유산원,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제주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제주생태관광지원센터,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 해녀박물관, KBS바다
해녀는 공기 공급장치 없이 무자맥질하여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을 말한다. 산소통 같은 기계장비 없이 잠수복과 오리발, 물안경 등을 착용하고 바다에 들어가 전복이나 소라, 성게, 미역, 우뭇가사리 등의 해산물을 채취한다. 가끔 작살로 쥐치나 문어와 같은 어류를 잡기도 한다. 해녀는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해녀는 한반도 각 해안과 여러 섬에 흩어져 있지만, 그 대부분이 제주도에 몰려 있다. 우리 나라의 해녀수는 약 2만 명으로 추산되며, 거의 모두가 제주도 해녀들이다. 과거에는 잠녀(潛女) 혹은 잠수(潛嫂)라 불렸다.
해녀의 발상지는 제주도로 현재 육지 해안에 있는 해녀들은 제주에서 유래되었다. 해녀는 오랜 역사적 연원을 지니고 있는데, 자연발생적 생업수단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기록에 해녀들의 나체조업을 금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 이전부터 해녀들이 존재했다. 처음에는 남녀의 구분없이 물질을 했으며 조선후기로 가면서 여성들만 일하는 형태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1703년 이형상 목사가 제작한 『탐라순력도』의 「병담범주」에는 해녀들의 전통적인 작업복을 입고 물질을 하는 해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해녀들에게 특수한 혈통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직 어렸을 때부터의 수련에 의하여 그 기량을 배워 익혀서 어로작업을 한다. 해녀가 되는 여성들은 7~8세부터 헤엄치는 연습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물질을 생활에서 배웠으며 15~17세 정도에 독립된 해녀가 되었다. 해녀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는 40세 전후로, 대개 60세 전후까지 해녀 생활을 한다. 그러나 현재는 해녀의 고령화가 심화되어 70대, 80대 해녀들도 제법 있다. 대부분 농사일을 겸하는 경우가 많고 물질만을 전업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농사일을 치르는 사이에 물때에 맞추어 바다로 나가 물질을 하므로, 이들의 밭은 뭍과 바다에 걸쳐 있는 셈이다.
물질이라 불리는 잠수 작업은 주로 봄에서 가을까지 이루어진다. 여름철에 많이 하지만 추운 겨울에도 물질을 하곤 한다. 물질은 바닷가에서 하는 ‘갓물질’과 여럿이 배를 타고 나가서 하는 ‘뱃물질’이 있다. ‘뱃물질’의 경우 보통 선주와 1년 단위로 계약하며 선주도 함께 출어한다. 나잠어장인 제1종 공동어장은 마을 단위로 나누어져 있는데, 큰 마을인 경우에는 동네 단위로 구분되기도 한다. 뭍처럼 그 구획이 뚜렷하지 못하고 입어관행(入漁慣行)이 곁들여 그 경계선을 둘러싼 분쟁이 많았다. 바닷가의 주민들은 그들의 어장에서 해산물을 캘 권리를 가지는 한편, 바다의 잡초를 베거나 밀려온 시체를 처리해야 하는 등의 의무가 지워져 있다.
해녀들은 마을단위의 어촌계에 가입함으로써 공동체를 이루며, 또한 해녀회나 잠수회를 조직하여 해녀들의 입어시기·공동채취·입어관행 등을 자치적으로 결의하고 수행한다. 또한 그들은 해산물의 공동양식과 공동채취로 공동수입을 확보하여 마을의 번영에 이바지하기도 한다. 해녀들이 다른 마을로 시집을 가면 친정마을에서의 입어권이 박탈되는 등 입어권에 대한 규정이 엄격하다. 그들은 마을단위로 ‘영등굿’과 ‘잠수굿’을 치름으로써 풍어를 빌기도 한다.
물질 작업은 하루에 3~4시간 정도 진행한다. 대개 수심 5m~10m 정도에서 작업하지만, 때때로 수심 15m 이상 들어가 2분 이상 잠수하기도 한다. 작업할 때는 중간에 2~3차례 휴식을 취해야 한다. 기량의 숙달 정도에 따라 상군(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 해녀로 구분한다. 상군 해녀는 물질을 가장 잘하는 해녀로 존경과 대우를 받는다.
해녀의 장비는 크게 물옷과 물질 도구로 나뉜다. 물질 도구에는 테왁과 망사리, 빗창, 종게호미, 갈고기, 소살, 눈 등이 있다. 테왁은 부력을 이용해 해녀들이 가슴에 안고 헤엄치는 기구다. 망사리는 자루 모양으로 채취한 해산물을 담는 망으로 테왁에 부착해 사용한다. 해산물을 채취할 때는 빗창과 종게호미가 쓰인다. 빗창은 30㎝ 가량의 무쇠칼로 바위에 붙은 전복 등을 캘 때 사용한다.
종게호미는 미역 등 해조류를 베는 낫이다. 조개와 같은 어패류를 캘 때는 쇠꼬챙이인 갈고기와 1m 가량의 작살인 소살을 사용한다. 눈은 방수경으로 족쉐눈과 쉐눈, 눈곽 등이 있다. 족쉐눈과 쉐눈은 해녀들이 물질할 때 끼는 작은 물안경이다. 알이 2개면 족쉐눈, 1개면 쉐눈이라 한다. 눈곽은 물안경을 보관하는 네모난 상자다. 오늘날 ‘왕눈’이라 불리는 물안경은 1950년대부터 쓰기 시작했다.
물옷은 해녀가 입는 작업복이다. 과거에는 무명으로 만들었으나 현재는 고무 잠수복이 쓰인다. 전통적인 재래작업복(물옷)은 상의에 해당하는 ‘물적삼’과 하의에 해당하는 ‘물소중이’로 구분한다. 머리에는 ‘물수건’을 착용해 물 속에서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았다. 재래식 물옷 대신 고무 잠수복을 입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고무 잠수복은 모자와 상의, 발목부터 가슴까지 올라오는 하의, 오리발로 이루어진다. 고무 잠수복을 착용하면서 해녀의 작업시간도 3~5 시간으로 늘어났으며 바닷속 20m 정도까지 물질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수심 깊은 곳에서 작업하면서 잠수병 등의 부작용이 생기는 사례도 있다. 제주도는 2012년 무렵부터 선박과의 충돌 등을 방지하고 사고 발생 시 조속한 구조를 위해 주황색 잠수복을 해녀들에게 보급하고 있다.
제주 해녀들은 19세기말부터 부산, 울산 등 경상남도 지방을 시작으로 전국의 여러 해안으로 출가(出稼) 조업을 나갔다. 이들은 경상북도와 강원도를 거쳐 청진에 이르기까지 점점 동해안 일대를 누비며 북상하였고, 남해안·서해안 및 울릉도·흑산도에 이르기까지 본토의 각 해안뿐만 아니라, 객주의 인솔에 따라 일본 각지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중국 랴오둥 반도의 뤼다(大連), 산둥 성의 칭다오(靑島)까지 나갔다. 이들의 출가 이유는 본토의 각 연안이나 외국 바다에도 값이 비싼 해조류와 패류 등이 많았으나 이를 캘 해녀가 없으므로, 그곳에 가서 제주도에서보다 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하여서였다. 1920년대부터 8·15해방까지 일본 각지에 약 1,500명, 한국 본토 연안에 약 2,500명이 출가한 것으로 전한다. 광복 이후 출가는 우리나라의 각 연안에 국한되었고, 1960년대 초까지는 경상북도 구룡포·감포·양포 등 영일만 일대에만도 몇천 명씩 집중적으로 나갔는데, 지금은 출가인원이 현저히 줄고 있다.
제주의 해녀는 1960년대 23,000명을 넘기도 했지만 계속 줄어들어 제주특별자치도청 해녀문화유산과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으로 제주 해녀는 3226명이며, 65%의 해녀들이 70대 이상이다. 고령화로 인해 해마다 평균 150명이 은퇴하고 있다. 해녀는 1965년에서 1975년 사이에 급속하게 감소했는데, 이는 제주도가 감귤농업과 관광산업을 집중 육성하면서 물질 이외의 다른 소득원이 생겨났고 마을어촌계 대부분이 가구당 1명의 해녀만 어촌계원으로 받아들였던 데에서 기인한다.
제주해녀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물질이 지속가능한 발전의 가치를 보여주는 유산으로 보호할 필요를 절감한 제주도는 인류의 무형유산의 관점에서 해녀 문화의 보전을 추진하였는데, 이 결과 2016년 12월 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17년 5월에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제주 해녀문화를 공동체 정신이 잘 드러난 문화유산이고, 자연친화적인 방법으로 물질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발전의 모델이 될 수 있으며, 해녀가 지닌 기술이 인정되고 가정경제에 기여하는 것을 통해 여권이 신장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제주의 해녀문화가 지닌 공동체 정신, 지속가능한 발전, 여성의 권리 등과 같은 가치를 재발견함으로써 제주 해녀문화의 보존과 전승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단행본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