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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 | 양옥경 | |||||
해녀 | 오상학 | 지해 김정동 |
상투를 틀고 갓을 쓴 모습은 서양인의 눈에 신기하게만 보였는데요. 이 같은 머리 모양은 관례라는 성인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관례에 대해 알아볼까요?
관례의 역사와 의미
관례의 관은 모자를 뜻하는 말로
상투를 틀어 관을 쓰는 남자의 성인식을 말하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행한 기록은 『고려사』에 등장합니다.
왕의 아들 왕주에게 관례를 행한 후 왕태자 내사제군사 내의령 정윤으로 세우고, 여러 신하들에게 장생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 『고려사』 광종 16년(965) 2월
주로 왕실의 태자와 왕자들이 관례를 치렀고 관례 후에는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조선시대에는 왕실뿐 아니라 문무관을 비롯한 민간에서도 관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관례는 성인식이기 때문에 성인의 자격이 필요합니다. 사회 활동을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어떻게 맺고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해야 되는지 공부를 충분히 해야 되는 거죠. 왕실에서는 일반 사대부 집안과 다르게 10세에서 12세 정도에 관례를 합니다. 이것은 왕위 책봉자를 빨리 정해서 (관례를 치르고) 왕위 계승자로서 준비를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김지영 책임연구원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여자들에게도 계례라는 성인식이 있었는데요. 길게 땋은 머리를 올려 비녀를 꽂는 의식으로 보통 15살 무렵, 혼례와 연결해 치렀습니다.
관례도 옛날과 지금을 고려하여 번거로운 것을 없앰으로써
사람들이 쉽게 거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가난한 집안의 사람들도 비로소
모두 거행할 수 있어 아쉬움이 없을 것이다.
- 이익 『성호선생전집』「잡저」 ‘산절관의’
또한 더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관례를 행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하고 비용도 줄이려고 노력했는데요.
이를 통해 가난한 선비나 백성들도 관례를 치를 수 있었던 것이죠.
우뚝한 모자로 머리를 장엄하게 하고 옷을 갖춰 몸을 감싸는 것은,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실행을 책임 지우려는 것이다. 예식만 행하고 그 도리를 행하지 않는다면, 어린아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현종실록』 현종 11년(1670) 3월 9일
이처럼 관례는 조선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는데요. 상투를 틀어 올리고 관을 쓰는 의식을 통해 강조하려던 것은 어른의 ‘무거운 책임감’ 이었습니다.
“관을 씌워주는 의식을 통해서 겉모양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책임감과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문화가 하나의 문화적 기풍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에는 관례가 끼친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지영 책임연구원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관례의 절차와 영향
관례 절차는 여러 기록으로 남겨져 전해지고 있는데요. 관례는 어떤 모습으로 전승, 재현되고 있을까요?
이곳은 경주 양동마을인데요. 매년 성년이 되는 사람을 관례자로 정해 관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주요 절차를 만나볼까요?
관례일이 되면 관례를 도울 어른들을 맞이하는데요. 관례를 주관하는 빈은 어질고 예법을 잘 아는 사람으로 정했습니다.
관례의 첫 순서가 시작됐는데요. 시가례입니다. 관례자의 머리를 빗겨 상투를 틀고 치포건을 씌우는데요. 의복은 평소 집안에서 입는 어른의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다음은 재가례인데요. 관례자에게 유건을 씌우고, 의복은 유생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삼가례에서는 관례자에게 갓을 씌우는데요. 어른의 사회 활동에 걸맞는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관례의 복식은 신분과 지역, 가문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요. 관과 의복을 세 번 갈아입는 과정은 어른으로써 점차 중요한 일을 행하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삼가례까지 마치면 관례자에게 술을 내리는데요. 어른으로서 본을 보일 것을 다짐하는 순서입니다.
마지막으로 관례자에게 성인의 이름인 자를 지어주는데요. 자를 받은 사람에게는 나이가 어려도 존대를 했고요.
각 절차에는 축사가 포함돼 있어, 축하의 의미와 함께 어른으로서 마음에 덕을 쌓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전통 관례 예식을 통해서 진짜 성인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받고 또 이제 성인으로서의 책임감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어르신들께 배우는 좋은 기회였던 거 같아요.” 이동준 / 대학생
“관례는 빈으로 모시는 분과 네트워크가 형성이 되는 겁니다. 사회초년생으로서 성인이 되어서 사회에 나가는 사람에게 어른을 소개시켜주고 이 어른을 통해서 어른의 발자취를 닮아가도록 하는 이런 부분들이 바로 관례를 통해서 네트워킹, 인연 맺음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신상구 양동문화연구소 소장
상투 없이는 성인으로 간주되지 않고 존칭도 붙여지지 않으며 정중한 대우도 받지 못한다.
- LH.언더우드 /
『상투의 나라(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조선 후기로 가면서 상투는 신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성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는데요. 또한 남성의 자부심이자 존경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관례는 남자들의 머리 장식에도 영향을 미쳤는데요. 상투를 고정하기 위해 남자들도 비녀를 사용했고, 머리에 두른 망건은 꾸민 듯 안 꾸민 듯 절제된 멋을 보여줬죠. 또 다양한 갓끈으로 유행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성인의 상징이었던 상투와 관례는 단발령의 시행으로 점차 약화되어 갔는데요.
1970년대 초 성년의 날이 제정되고 이후 〈건전가정의례준칙〉에 성년례가 포함되면서 관례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는데요.
어른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중시했던 관례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현 시대에 맞는 성인식의 모습도 함께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관례는 남자의 성인식으로 상투를 틀고 관을 쓰는 의례이다.
2. 계례는 여자의 성인식으로 쪽을 찌어 비녀를 꽂는 의례이다.
3. 관례 의식에는 성인이 되었음을 널리 알리고 어른의 역할과 책임감을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1. 관례 의식이란 무엇인가
현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20세가 되었을 때 성인식을 한다. 이때 성인식은 성년의 ‘나이’에 이르렀음을 축하하는 의식이다. 조선시대에는 ‘관례’라는 이름의 성인식이 있었다. 조선시대 관례 의식은 미숙한 어린 시절을 벗어나 완성된 사람=성인으로서 삶을 책임질 자격을 갖추게 되었음을 선언하고 축하하는 의식이었다. 15세에서 20세의 나이가 되고 어느 정도의 공부를 마치면, 여러 사람들을 초빙해서 머리를 올린 후 성인의 모자와 옷으로 갈아입고, 성인으로서 도리를 다하도록 당부하는 절차를 밟아 예식을 치렀다. 다른 문화의 전통 성년식에서는 신체적 고통이나 모험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조선시대의 관례 의식은 달랐다. 성인의 가장 중요한 자격을 ‘사람됨’이라는 인성을 갖추는 것으로 규정하고, 앞으로의 삶 속에서 ‘사람됨’을 추구하며 책임 있게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례 의식은 중국의 유교 제도로부터 유래하였지만, 이를 우리의 실정에 맞게 수용하고 실천하는 동안 한국 전통 문화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2. 우리나라의 관례 수용과 실천
중국의 유교식 관례 의식은 유가 경전의 수입과 함께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에도 관례를 행한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왕실이나 귀족관료 가문에서 일부 실행되었던 것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민간의 생활 의례로서 관례가 광범위하게 실행되었다. 이렇게 가정의례의 일부로서 관례가 강조된 것은 주자학의 수용과 관계가 깊다. 주자학에서는 가정교육을 매우 강조했다. 집안에서의 일상 예절과 함께 관례·혼례·상례·제례 등을 형편에 맞게 실천하면서 타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고 보았다. 관례는 가정에서의 네 가지 예제[관·혼·상·제] 중 첫 번째에 있었고, 모든 예의 시작으로 중시되었다.
고려 말에는 『주자가례』를 일부 학자들이 들여와 실천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예제를 정할 때 『주자가례』를 참조했고, 민간에 가례를 적극적으로 보급하여 민간 풍속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학자들은 가례를 보다 조선 현실에 맞게 고쳐서 더 많은 가정에서 보다 쉽게 실천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고민하였다. 조선 중·후기에 이르면 사 이상의 가문에서는 혼례와 함께 간소하게 치르더라도 관례를 실천하는 경우가 많았다. 삼가(三加) 대신 일가(一加)만 한다든가, 관례 때 입는 옷을 대여하는 등 지위나 형편에 관계없이 더 많은 가정에서 관례를 치르는 방법이 제안되었다.
3. 관례 의식의 실제
관례 의식은 준비에서 마무리까지 여러 절차를 거치지만, 핵심은 세 번 관을 고쳐 쓰면서 성인의 외양으로 바꾸어나가는 ‘삼가(三加) 절차’에 있었다. 복건-갓-사모, 치포건-유건-갓 등 삼가에서 쓰는 모자 및 모자와 한 벌을 이루는 옷은 집안별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르지 않았다. 세 차례 관과 옷을 바꿔 갈아입는 절차는 성인으로서, 더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을 상징했다. 또 성인이 된 주인공은 자(字)라는 성인의 이름을 받았다. 관례가 끝나면 새로 관례를 치른 사람이 두루 집안 및 지역의 어른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렸다. 어린 시절 집안에서 불리던 이름 대신 성인의 새 이름을 가지고 본격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사대부가의 남성들은 15세~20세 사이에 관례를 치렀다.
여성의 경우에는 어땠을까. 『주자가례』에는 여성 관례 즉 계례의식이 수록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대부가 여성들은 혼례의 일부로서 계례를 치렀다. 계례와 함께 성인 여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한 교육도 이루어졌다. 외형상으로는 모든 사대부가의 남성과 여성들이 관례-혼례를 거치면서 어린아이 때의 머리모양을 바꿔 성인의 머리모양을 하고 관을 쓰거나 비녀를 꽂았다. 남자의 상투와 여자의 올림머리는 그 자체가 성인의 상징이 되었다.
4. 민간의 모범으로서의 왕실 관례
조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왕실에서도 관례를 행했다. 사가에서는 관례를 치른 후에야 공적인 일을 행할 수 있지만, 왕실에서는 그 순서가 달랐다. 세자는 책봉의식 때에 이미 관을 썼지만, 이후 공부로 성인의 자격을 갖춘 후 10세~12세 무렵에 관례를 치렀다. 세자는 다시 어린아이의 차림새로 삼가의식을 치렀다. 삼가의식과 함께 성인의 이름도 새로 받았다. 이 모든 절차는 사대부 관례와 기본적으로 같았다. 앞으로 나라를 책임져야 할 왕세자였기에 어른이 되는 의식의 의미도 각별했다. 관례를 치를 때 왕이 내린 교서 속에는 “우뚝한 관으로 머리를 장엄하게 하고 옷을 갖춰 입음은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실행을 책임지게 하려는 것이다. 의관을 단정히 하고, 시선을 바로 하며, 어질고 덕 있는 이를 공경하고 학문에 몰두하되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안일과 나태함이 없게 하라.”는 간곡한 당부가 담겨 있었다.
숙종 대 이후로는 왕세자뿐 아니라 왕자, 왕손들의 관례도 정식화되었다. 왕실 여성들도 15세가 되면 관례를 치렀다. 영조의 며느리였던 현빈이나 혜빈[혜경궁], 19세기 사부빈으로 왕실에 들어왔던 경빈 김씨 등이 관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왕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세 번 머리를 바꾸는 의식을 거치며, 이제 왕실의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음을 선언했다.
5. 관례와 조선의 일상문화
조선시대에는 지속적으로 관례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왕실에서도 관례를 솔선해서 실천해나갔다. 관례 의식에서 강조되었던 성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지배층 성인의 외양에서 비롯된 ‘사람이 된 자[성인]의 모습’은 점차 조선 문화의 중요한 코드를 이루었다. 성인의 외양이 사회적으로 중시되면서 남성 여성 가릴 것 없이 모자나 머리장식, 가발 등에 신경을 썼다.
조선후기의 풍속화를 통해 18세기에는 모든 조선의 남녀 성인들이 관례를 치른 사람의 꾸밈새를 갖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자는 머리를 틀어 올려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며, 실내에서는 탕건과 같은 실내용 모자를, 외출할 때에는 갓이나 입자 등 다양한 모자를 썼다. 여성도 머리모양으로 아이와 성인을 바로 구분할 수 있었다. 19세기 중엽 일반 백성이나 천인이 넓은 소매의 도포 입는 것을 제한하는 규칙을 내릴 때에도, 관례와 혼례를 치를 때 3일간은 허용한다는 예외 규정을 둘 정도로 관례 문화는 민간 깊숙이 확산되었다. 19세기 말 조선에 온 외국인들은 조선을 ‘상투의 나라’로 불렀다. 상투 튼 똑같은 머리모양의 이면에는 오랫동안 실천해 온 ‘사람됨’을 중시하는 조선의 성인식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근대적 외양’을 강제하는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조선식 성인식 전통은 점차 약화되었다. 단발령 이후 백여 년이 지난 지금, 올림머리와 모자라는 오래된 ‘성인됨’의 이미지는 이미 사라진 전통이 되었다. 관례문화의 내용적 측면, 즉 ‘성인’의 자격으로 ‘사람됨’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적 심성은 얼마든지 새로운 형식에 담아 이어나갈 수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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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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