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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돈으로 부르고 있는 화폐!
동전과 지폐뿐 아니라 최근에는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과 포인트, 모바일 머니, 가상화폐까지 화폐의 종류와 사용방법도 더욱 다양하고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점점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현대 화폐
그렇다면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화폐들을 사용했을까요?
우리나라에는 불변의 화폐가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종종 하는 말,
‘쌀 팔러 간다.’
쌀을 사지 않고 왜 판다고 하는 걸까요?
바로 과거에는 쌀로 물물교환을 했기 때문입니다.
화폐는 상품교환의 매개물이면서 가치의 척도이자 지불수단, 그리고 가치 저장의 목적으로 유통되는 재물을 말합니다.
고대에는 조개, 철, 귀금속 등이 화폐 기능을 했지만, 실생활에서는 곡물과 직물이 대표적인 물품화폐로 사용됐습니다.
곡물 중에는 쌀, 보리, 콩, 기장 등이 주요 화폐로 이용됐는데요,
껍질을 깎아낸 백미는 일반 쌀보다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되었습니다. 직물화폐로는 삼베와 모시, 명주 등이 대표적으로 사용되었는데요,
삼국시대부터는 비단이 고급 화폐로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과거에는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입고 먹는, 의·식 관련 물품을 화폐로 선호했습니다.
고려시대에 와서 동전이 제작되었는데요, 우리나라 최초의 동전은 철로 주조한 ‘건원중보’입니다.
건원중보는 중국 당의 동전을 참고하였으나 뒷면에 고려를 상징하는 ‘동국’을 기재해 차별화했습니다.
이때부터 국가 주도로 동전을 주조하고 유통시키는 화폐정책이 실시되었는데요, 이는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재정을 통제하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백성들을 부유하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데는
동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
이제 비로소 금속을 녹여 돈을 만드는 법령을 만들었다.
- 『고려사 』식화지(食貨志) 화폐조(貨幣條), 숙종 7년(1102)
고려 숙종 때는 동전을 관리하는 관청인 주전도감을 설치하여 ‘해동통보’를 주조하고 관리의 녹봉 지급과 주점에서도 동전의 사용을 강제하는 등 화폐정책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동전은 시장에서 가치를 보장받지 못했고 물건을 매매하기에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널리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곡물과 직물이 중요한 화폐의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면포가 화폐 기능의 중심으로 부상했는데요, 일정 품질을 갖춘 면포는 국가에서 화폐로 인정하는 ‘조선통폐지인’ 도장을 찍어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곡물과 직물은 여러 시대를 거쳐 오랫동안 중요한 화폐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조선왕조의 동전 유통을 위한 집념
우리나라에서 동전이 대중적으로 확산된 건 언제부터일까요?
조선의 왕들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화폐정책을 시행하고 동전을 주조하여 사용하도록 했는데요,
이를 통해 동전유통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고 동전의 경제적 가치를 높이고자 했습니다.
시장에서는 물품화폐 사용을 선호했지만, 임진왜란 이후 국가재정 확보와 군수조달 과정에서 효율적으로 유통할 수 있는 동전의 필요성이 부각됐습니다.
경복궁 앞길의 좌우 행랑에 사람을
모집하여 점포를 열게 하고, ... 그들에게 음식점을 배설하고,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상대하게 했으면 합니다.
- 『인조실록』인조 4년(1626) 윤6월 18일
인조는 동전 유통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경복궁 앞길에 사람을 모집하여 점포를 열게 하고 동전으로 거래하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전의 활용가치를 경험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인조는 동전 유통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경복궁 앞길에 사람을 모집하여 점포를 열게 하고 동전으로 거래하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전의 활용가치를 경험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또 세금을 동전으로 낼 수 있는 정책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고, 관원이 여행을 할 때에도 동전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이와 함께 가뭄과 흉년, 계절적 요인 등으로 곡물과 면포의 생산 유통이 점점 어려워지고, 시장과 상인의 등장으로 휴대와 보관이 편한 화폐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동전의 가치도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숙종 때 ‘상평통보’가 주조되면서 전국적으로 동전이 유통되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화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상평통보는 주조하는 지방마다 모양이 조금씩 달랐으며 그 종류도 약 3천여 종이나 됐는데요,
동그란 모양은 하늘, 가운데 네모는 땅을 의미하며, 앞면에는 상평통보라는 글자가 있고, 뒷면에는 부호와 오행의 한 글자, 숫자 등을 새겨서 동전을 만든 관청과 담당자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상평통보는 약 200여 년간 우리나라 역사상 전국에서 가장 오래 사용된 화폐입니다.
상평통보는 엽전으로도 불렸는데요, 돈을 주조하는 틀이 나뭇가지에 잎이 달린 것처럼 보인 것에서 유래됐습니다.
그렇다면 상평통보의 가치는 지금 기준으로 얼마였을까요?
상평통보 1냥이면 쌀 20kg을 살 수 있고, 4냥이면 쌀 한가마나 은 1냥을 살 수 있었습니다.
상평통보 한 푼은 지금의 2~300원 정도의 가치인데요, 매우 적은 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한 푼 줍쇼’도 여기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동전을 통해 부의 축적이 가능해졌고, 사회 전반에 다양한 변화도 가져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당시 부의 축적을 열망하는 문화가 반영된 별전의 등장인데요,
별전은 화폐의 기능이 없는 장식품입니다.
고종 때는 새로운 화폐인 당백전과 당오전을 발행했지만 고액의 동전을 다량 발행하면서화폐의 가치를 급격히 떨어뜨렸고 시장의 혼란만 증가시켰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화폐가 유입되자 조선은 화폐 주권마저 상실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는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1950년 8월에 한국은행 명칭이 들어간 백 원권과 천 원권이 최초로 발행되었고, 70년대 들어서면서 오천 원권과 만 원권이, 2009년에 오만 원권의 고액권이 발행되었습니다.
지폐에 그려진 인물과 문화유산들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상징이자, 동시에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려졌습니다.
대표적으로 만 원권에는 세종대왕과 일월오봉도, 용비어천가, 뒷면에는 천체 관측기구인 혼천의와 별자리를 그린 천상열차분야지도가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그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따라 화폐의 가치와 역사도 함께 변화해왔습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고대에는 실생활에서 곡물과 직물 등의 물품화폐를 주로 사용했다.
2. 우리나라 최초의 동전은 철로 주조한 건원중보이다.
3. 상평통보는 우리나라 화폐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쓰인 돈이다.
1. 화폐의 개념과 성격: 화폐란?
화폐의 사전적 의미는 상품 교환의 매개물이면서 가치의 척도이자 지불의 수단 그리고 가치 저장의 목적으로 유통되는 재물이라고 볼 수 있다. 화폐의 기능은 가치의 척도이자 지급수단, 가치의 저장 수단이면서 교환을 수행하게 된다. 이로 본다면 현재 사용되고 있는 동전, 지폐, 어음은 물론 게임머니라든가 가상화폐의 일종인 비트코인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류사에서 보면 이미 기원전부터 금, 은과 같은 귀금속이 교환수단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특정한 조개를 화폐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그 잔재는 한자의 부수 중 ‘패(貝)’자가 들어간 단어가 경제활동과 관련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화폐는 기본적으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교환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물물교환 단위에서도 각종 물품이 화폐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화폐는 그 형태와 제도가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오늘날 대체로 ‘돈’으로 불리고 있다. 엄격히 말하면 화폐의 한 종류인 돈이 오늘날 화폐의 대명사처럼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조선 후기 동전이 주조되고 경제활동의 중심을 동전으로 이루어진 후의 결과이다. ‘돈’의 본연의 의미는 주조화폐의 무게 단위인 ‘전(錢)’으로 ‘돈쭝’으로 읽히면서 돈으로 굳어진 결과였다.
“한 푼(닢) 줍쇼!”라는 말도 동전의 가장 작은 단위인 1문(文)이 한 푼인데서 기원했다. ‘한 닢(葉’)이라는 것도 동전을 주조할 때 나뭇가지 모양에 동전이 달린 것이 마치 나뭇잎 모양이라 하여 생긴 말이다. 이처럼 돈과 관련한 여러 문화와 이야기가 화폐에 묻어 있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동전일 것이다.
2. 고대의 다양한 화폐
농업이 발달하고 잉여 생산이 발생하면서 교환수단으로서 화폐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본다면 한반도에서도 신석기시대, 늦어도 청동기 시대에는 화폐가 등장했을 것이 분명하다.
곡물은 일상생활의 대표적 교환수단으로 이용된 화폐였다. 벼, 보리, 콩, 기장 등의 곡물이 화폐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시장에 살 팔러 간다.”는 말이 20세기 초까지 통용된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유용하게 곡물이 화폐 기능을 했음을 보여준다. 삼한 시대에는 또한 변한과 진한에서 철을 생산하여 대외 교역이나 시장에서 철을 무게에 따라 화폐로 이용하는 칭량화폐(稱量貨幣)로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사회에서 곡물 이외의 중요한 화폐로서 직물을 이용한 포화(布貨)가 있다. 포화는 마포(麻布)를 중심으로 저포(苧布), 면주(綿紬)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삼베, 모시, 명주를 지칭하는 것으로 대마, 모시풀과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고치로부터 추출한 섬유로 직조한 직물이다.
한반도의 고대사회에서 사용한 화폐는 생활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의식(衣食)을 물품화폐로 일상 매매와 교환에 사용하였으며 이때 형성된 매매 관행과 화폐수단은 조선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3. 고려 시대 국가의 화폐 통제노력
고려 시대에는 곡물과 포목이 여전히 화폐 기능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국가 주도의 동전 주조와 유통 노력이 시도되면서 화폐 정책이 시행되었다.
고려 초기 개원통보(開元通寶)와 같은 당나라 시대 동전이 유입되어 유통 및 제의에 이용되었던 흔적이 있다. 고려 시대의 주전을 통한 행전(行錢)은 크게 고려 성종과 숙종 두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996년(성종 15) 비로소 ‘건원중보’ 철전(동전)을 주조하여 유통하였다. ‘건원중보(乾元重寶)’는 당나라의 것을 모본으로 제작하면서 뒷면에 ‘동국(東國)’이라는 전문을 넣어 구분하였다.
1101년(숙종 6) ‘해동통보(海東通寶)’를 통해 행전이 다시 시도되었다. 동전을 주조하기 위한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하여 법화(法貨)로 유통하기 위해 관리의 녹봉은 물론 주점에서도 동전 사용을 강제했다. 고려 전반기 철전 및 동전과 같은 전문의 주조와 유통 시도는 추포(麤布)가 등장하는 등 일상생활의 용도에까지 파급되지 못하면서 중단되었다.
전문과 더불어 고려 시대 화폐로 도입된 것은 은이었다. 1101년(숙종 6) 은을 이용하여 은병(銀甁)을 주조했다. 이 은병은 모양을 국토를 본 따 제작되었다고 하며 민간에서는 활구(闊口)로 불렸다고 전하나 실물은 없다. 제조 과정에서 동을 섞어 주조하면서 품질이 저하되고 곡물과 포목이 주로 이용되면서 한계에 직면했다.
고려 시대는 철전, 동전을 비롯하여 은병 등을 주조하여 국가에 의한 통화 통제를 시도했다. 여기에는 이들 통화의 발행이 곧 국가와 왕실의 권위 및 정통성과 관련되어 있어 자주성의 측면이 있으며, 실용적 측면에서도 세금의 징수와 관리 그리고 재정 운영의 편의성이 고려된 결과였다. 그러나 특정 지역과 시기에 한정됨에 따라 일상생활에 지속적인 화폐 기능은 여전히 곡물과 포화가 사용되어 있었다.
4. 조선 시대 통용화폐[國幣]와 동전의 유통
조선 시대에는 개국과 동시에 법정화폐인 국폐(國幣)를 법전에 반영하여 화폐의 발행과 관리를 추구하고자 했다. 조선 시대에도 여전히 곡물과 포화가 일상에서 기본적인 화폐기능을 수행했다. 교환수단으로 이용된 주된 곡물은 미(米), 백미(白米), 콩(太), 보리(牟麥) 등이었다. 특히 백미는 도정한 쌀로서 그 가치와 이용이 다른 곡물과 차별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포화로 이용된 직물은 마포, 면포, 저포가 고대 이래 지속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면포(綿布)가 새로운 화폐로 급부상하였다. 면포는 고려 말 목화가 유입된 이래 조선 초기 국가적 시책에 따라 전국에 급격히 보급되면서 이를 이용해 직조한 목면(木綿)을 통해 의류 혁명이 일어났다. 목면, 즉 면포는 기존의 여러 직물을 대체하면서 포목(布木)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목면이 국내적으로도 화폐로 기능하는 안정성이 확보되고 국폐로 논의되게 되었다. 1406년(태종 6)에는 통용화폐인 5승을 면포 정포(正布)에 대해 ‘조선통폐지인(朝鮮通幣之印)’의 도장을 직물의 양 끝단에 찍어 통제하고자 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화폐로는 고려 말 발행이 중단되었던 저화가 있다. 1402년(태종 2) 종이로 저화(楮貨)를 인조(印造)할 수 있었다. 15세기 중반까지 저화에 대한 폐지와 시행의 반복을 거듭하다가 1521년(중종 7) 즈음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개국을 전후하여 경제적 주도권을 우선 확보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조속히 ‘국폐(國幣)’에 대한 확정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성종 즉위 후 반사된 『경국대전』에는 국폐로 면포를 중심으로 한 포목과 당시 통용을 시도하고 있던 저화를 수록하게 되었다.
조선 최초의 동전은 ‘조선통보’로서 태종조에 처음 시도되었다가 1423년(세종 5)에 주전이 본격화되었다. 세종조에 지속적으로 동전의 주조와 시장 유포를 통한 유통이 시도되었으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고 중단하면서 국폐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후 1603년(선조 36) 동전의 주조에 대한 논의에 착수하였으며 그 배경은 전란 수습을 위한 국가 재정의 확보라는 현실적 목적과 동시에 백성의 생활을 배려한다는 명목이었다. 인조 때에는 시장에 적극적으로 동전을 산포하고 매매에 활용하도록 장려하는 차원에서 주전과 행전이 시도되었으나 연이은 호란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당시 1633년(인조 11) ‘조선통보’가 다시 주조되기도 했다. 효종 때에도 동전 공급의 부족과 정책적 연속성이 인조조의 행전 실패 요인으로 분석하고 10년을 정책 목표로 설정하고 집중적으로 시장에 동전을 공급했으나 성공에 이르지는 못했다.
1678년(숙종 4)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고 전국적인 유통이 시행되었다. 상평통보는 본격적인 통용화폐의 지위를 확보해 나가기 시작했다. 17세기 말부터 토지와 노비의 거래는 물론 여행에도 동전을 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상평통보의 주전과 행전이 성공하게 되면서 1746년(영조 22)에 반사된 『속대전』에 동전이 국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5. 근·현대의 화폐
조선 후기 동전은 안정적인 가치 저장 수단이자, 동전이 바로 소재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널리 화폐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른바 상품의 교역이 증대하고 화폐 중심의 경제생활이 이루어지는 상품화폐 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제국주의 세력의 접근에 따른 대외적 위기와 국내 정치와 경제의 불안에 대응하기 위해 1866년(고종 3) 발행된 당백전(當百錢)과 1883년(고종 20)의 당오전(當五錢)은 시장의 동전에 대한 신인도를 급격히 떨어뜨려 시장의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1894년(고종 31)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을 통해 은본위제로 전환함과 동시에 일본 화폐의 유통을 허용하게 되면서 조선의 화폐 주권을 상실하게 되고, 이는 결국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전조의 하나로 작용하게 되었다.
1909년 우리나라 최초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이 설립되었으나 곧 일제 강점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한국은행권의 제조도 일본의 인쇄국에서 맡았다. 이후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개칭하고 은행권을 발행했다. 독립 이후 1950년 한국은행법에 따라 은행권을 발급하였으며, 변화를 거듭하여 오늘날 상용하는 동전과 지폐에 이르고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도록
단행본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