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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일상의 평범한 대화 속에, 정치, 경제, 스포츠 등 다양한 뉴스 속에서 우리가 흔히 듣고 말하던 이 단어들!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들이 모두 바둑 용어라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오랜 세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온 바둑!
우리 역사 속에서 바둑은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까요?
바둑의 옛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검은 돌과 흰 돌의 겨루기 - 바둑의 전래와 향유

가로 19줄
세로 19줄
361개의 교차점.

바둑은 바둑판 위에 흰 돌과 검은 돌을 한 점 한 점 번갈아 놓으며 누가 더 큰 집을 짓는가를 겨루는 놀이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바둑은 기 또는 혁이라고 기록되기도 하고, 위기, 혁기라고도 합니다. 근대 일본 바둑의 영향을 받아 영어로는 ‘고 (go)'라고 합니다.

수 천 년 전, 중국에서 기원한 바둑은 한반도로 전래되었는데요, 우리 역사에는 삼국시대에 바둑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삼국시대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바둑은 상류층의 놀이로 인기가 높았는데요, 역사서에는 바둑 실력으로 높이 평가받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원선지는 재능이 많아서 일을 처리함에 서두르지 않고 상세하게 하였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바둑을 잘 두었다.

-『고려사』「열전」 원선지

반상유희로 대접받으며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 온 바둑.

특히 조선시대에는 선비가 갖춰야 할 사예, 네 가지 기예 중 하나로 불리며 상류층의 교양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바둑을 즐기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도 없었습니다.

玲瓏花影覆瑤碁 영롱한 꽃그림자 바둑판을 덮었는데
日午松陰落子遲 한낮에 소나무 그늘에서 천천히 바둑을 두노라.
溪畔白龍新賭得 시냇가에 흰 용을 내기해서 얻으니
夕陽騎出向天池 석양에 그 용을 타고 하늘 연못을 향해 달려가리라.

- 『난설헌집』「유선사」

역사의 다양한 장면에 등장하는 바둑은 지금 우리가 두는 현대 바둑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순장바둑’이라는 고유의 바둑이 있었습니다. 순장바둑은 17개의 돌을 먼저 놓고 시작합니다.

“순장바둑 같은 경우 사전에 치석된 돌들이 많기 때문에 집들이 굉장히 잘게 쪼개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전투가 많이 일어나 잔재미가 있다면 일본식으로 아무 돌도 놓지 않고 바둑을 시작하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해서 바둑을 둬야하기 때문에 그만큼 변화가 다양합니다.”

남치형 교수/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순장바둑은 사라지게 되었으며 1950년 대 일본에서 바둑 유학 후 귀국한 조남철 국수를 중심으로 일본식 바둑이 자리를 잡으며 오늘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놀이, 그 이상의 가치 - 역사 속 바둑의 다양한 모습

수 천 년의 시간 동안 거의 원형으로 이어져 온 바둑!
때로 바둑은 놀이 그 이상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바둑은 나라와 나라가 우정을 나누는 외교의 수단으로 자주 활용되었습니다.

바둑판을 선물하거나 바둑을 통해 친분을 쌓는 것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왔는데요, 상아로 상감되고 이국적인 동식물이 장식된 이 목재 바둑판은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보낸 선물로 보여 집니다.

“목화자단기국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는 백제 의자왕이 당시 일본인 세력가에게 보내주었던 외교적 선물로 일본에서는 당나라 제품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바둑판은 화점이 17개여서 한국의 순장바둑판 형태를 띠고 있어서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한반도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김영심 전시기획과장 / 한성백제박물관

또한 다양한 묘수와 판세를 읽는 전략으로 승부를 가르는 것이 바둑인 만큼 전쟁의 전략과 용병술을 바둑 속에서 찾기도 하였습니다.

류성룡이 아뢰기를,
“험준한 곳을 지키는 것은 마치 바둑판 위에 바둑알을 놓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지킬 만한 곳을 가려서 지킨 뒤에야 이길 수 있습니다.”

-『선조실록』선조 26년(1593) 윤11월 2일

361개의 교차점.
그 위에서 일어나는 무한한 두뇌의 게임!

어떤 대국도 같은 판이 없다고 할 정도로 바둑은 뛰어난 창조성과 자유로움으로 수 천 년 동안 인간을 매료시켜왔습니다.

“바둑은 자유예요. 361개의 교차점. 거기 안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그게 좋은 수냐 나쁜 수냐 그것뿐이지, ‘여기는 안 된다’ 그런 게 없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나 그런 생각입니다.”

조훈현 국수

인공지능과의 대결로 또 한 번, 역사의 화제가 되었던 바둑!
승패의 재미뿐 아니라 한 수 한 수 두는 과정 속에서 삶의 지혜도 얻는다 하였기에 바둑은 우리의 소중한 놀이로 앞으로도 계속 자리할 것입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바둑은 , 이라고 하며 위기, 혁기라고도 불렸다.
2. 순장바둑은 17개의 바둑돌을 먼저 깔아두고 시작한다.
3. 바둑은 거문고, 글, 그림과 함께 사예로 불리며 상류층의 교양으로 여겨졌다.

해설

1. 한반도에서는 언제 처음 바둑이 두어졌을까?

중국이 바둑의 기원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어떤 형태로 두어지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중국의 고문헌에는 “요임금 창제설”이 자주 등장하지만, 요임금에 관한 많은 언급 자체가 후대에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고 특히 바둑이 그렇게 오래전부터 두어졌음을 증명해줄 물적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공자와 맹자 등의 글에 바둑이 등장하고, 한 시기의 문헌에서는 바둑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그리고 후한 시기의 묘에서 상당이 잘 만들어진 석제나 도자기 바둑판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춘추시대 무렵부터는 바둑이 널리 두어졌음을 추측해보는 정도이다.

초기 바둑판의 규격은 지금과는 달리 가로 세로가 각각 17줄이었다.(현재는 각각 19줄이다.) 여타의 게임도구들이 그러하듯 조금 더 단순하고 배우기 쉽고 빨리 승부가 결정되는 형태에서 조금 더 복잡하고, 더 많은 숙련이 필요하고, 한 판을 끝내는 데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현재까지 17줄 바둑판은 중국과 티베트 지역에서만 발견되었고, 한반도와 일본에서는 19줄 바둑판만 발견된 상황으로 추정컨대, 중국에서 19줄 바둑판이 등장한 이후에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대체로 그 시기는 한반도에 한사군이 설치된 무렵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바둑판의 규격이 19줄이 된 이후에도 각 지역에서 사용하는 바둑 규칙들은 달랐다. 일단 화점의 개수가 달랐는데, 중국은 초기부터 20세기까지 5개, 티베트는 13개, 일본은 9개, 한반도에서 두어진 순장바둑은 17개였다. 화점은 일본의 경우만 제외하고 바둑을 두기 시작할 때의 돌의 배치를 표시한다는 점에서 바둑 기술의 내용도 어느 정도 좌우했다. 또한 결과를 판정하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어서 중국에서는 바둑판에 남은 돌의 수를 중시하고, 일본은 집의 수를, 그리고 순장은 이 둘과는 조금씩 다른 경계선을 중시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이처럼 바둑판의 규격이나 규칙이 나라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돌이 살고 죽는 기본적인 규칙은 같았기 때문에 각 지역은 각각의 규칙과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교류하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2.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의 바둑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모두에서 바둑이 향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주로 왕이나 관료, 군인, 승려들 사이에 주로 두어졌으며, 이들은 당이나 일본 등과 교류할 때 바둑판을 선물하거나 바둑을 통해 친분을 쌓거나 때때로 경쟁했다. 특히 일본 쇼소인(정창원)이 소장한 홍아감아발루기자(붉은색과 청색의 바둑알)나 바둑알을 담는 통인 은평탈합자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일본의 당대 유력자에게 선물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백제의 제작기술의 높은 수준과 함께 바둑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역시 쇼소인에 보관되어 있는 목화자단기국(바둑판)은 비록 출처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둑판 위의 화점의 개수와 화점의 모양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목화자단기국은 단지 삼국시대의 공예 기술을 보여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화점의 개수를 통해 이미 당시에 순장바둑이 두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의미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신라의 경우 삼국을 통일하기 전부터 당과의 관계가 깊었는데, 왕의 책봉과 관련한 중국의 사신단에 바둑 고수가 일부러 포함될 정도로 바둑을 즐긴 나라였다. 통일 이후에 당에 유학하거나 파견된 이들 중에는 바둑의 고수들도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최치원 등과도 교유하였던 박구라는 인물은 당의 궁궐에 속한 기사인 기대조를 역임할 정도로 바둑 실력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고려와 조선시대의 바둑

『고려사』 〈악지〉에 전해지는 예성강곡은 바둑이 고려시대에는 상인계급 사이에서도 즐기는 놀이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중국 송의 상인과 바둑으로 내기를 한다는 내용을 통해 바둑이 내기의 수단으로 쓰였음도 함께 알 수 있다. 바둑을 내기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조선시대까지도 계속 이어지는데, 머리 장식을 바둑 내기로 땄다는 허난설헌의 시, 쌍륙이나 바둑을 두며 내기를 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들이 그 증거다. 선비들이 금기서화를 필수교양으로 여기자 그들을 상대하는 기녀들 역시 금기서화를 습득함으로써 여성들 사이에서도 바둑이 퍼져나갔다.

조선 후기가 되면 바둑을 생계 수단의 하나로 삼는 고수들도 등장한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바둑 실력을 이용하여 지역의 후원자들로부터 후원을 받아 생활했다. 지위나 계층이 낮은 사람이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 접근하여 호의를 얻는 수단으로 바둑이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는 글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숫자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음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비록 바둑만을 업으로 하여 살아가기에는 바둑 시장의 성숙도가 매우 낮았지만, 바둑이 단순한 취미에서 선비들의 교양의 일부로, 또 그들과 교류하는 사람들의 실용적 수단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개화기에는 한일 간의 교류가 많아짐과 동시에 순장과 일본식 바둑의 차이도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옥균과 이인직 같은 이들은 순장바둑을 일본에 소개하기 위해 일부러 일본의 기사들과 순장바둑을 두기도 하였다. 반대로 일본의 전문기사들이 조선을 방문하여 일본 바둑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미 17세기 초부터 바둑의 전문화가 이루어진 일본의 기사들은 그 실력이 조선의 기사들은 물론이고 중국의 기사들도 압도할 정도였고, 이러한 실력 차이는 훗날 순장바둑이 폐지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4. 일제강점기의 바둑과 순장바둑의 폐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통해 서양의 문물들이 조선에 많이 전해졌지만, 바둑의 경우에는 일본에서 300년 이상 다듬어진 전문기사제도, 바둑협회제도, 기전(바둑대회), 신문관전기, 단위제 등의 제도와 바둑을 교육하고, 기사를 양성하고, 바둑과 관련한 용품을 팔고, 상설기원을 여는 등의 바둑시장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이전까지 개인의 사랑방 취미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순장바둑만 두었던 조선의 기사들은 일본식의 바둑이 조선의 바둑 문화를 침식해 가는 것에 저항하여 적극적으로 연구회를 조직하고, 신문 등의 후원자를 설득하여 바둑대회를 개최하고, 순장바둑을 소개하는 잡지를 창간하고, 상설기원을 여는 등의 노력을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1937년 조선의 대표기사들은 순장바둑을 완전히 폐지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조선에서 열린 바둑대회는 모두 일본식으로만 개최되게 된다. 해방 후에는 일본에서 전문기사 자격증을 딴 조남철이 귀국하여 본격적으로 일본의 제도를 도입하고, 한국기원을 설립하고, 일본식 바둑을 교육하여 후배와 제자를 양성함으로써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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