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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기술과 교통의 발전으로 언제 어디서든 전국의 맛깔 나는 산지 음식들을 만날 수 있는 요즘
하지만 운반과 보관이 어려웠던 과거에도 ‘지엄한 권력과 위엄’ 아래 최고의 음식들로 차려진 상이 있었으니 바로, 왕의 밥상이었습니다.

최고의 맛과 존엄을 지녔던 궁중의 밥상
우리 밥상 본연의 맛과 전통을 지닌 ‘궁중음식’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왕의 식사는 ‘삼시세끼’가 아니라 ‘오시오끼’였다?

옛날 궁중에서 차려졌던 음식을 통칭해 이르는 말 ‘궁중 음식’
단군 이래 조선왕조까지의 왕실 역사와 함께 해왔을 거라 예상되지만 아쉽게도 궁중음식과 관련된 기록은 조선 중기 이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가뭄으로 인하여 왕비대전에서 감선(減膳) 하였는데, 지금 비가 이미 흡족히 내린 까닭으로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그전대로 회복하기를 청한다.

- 『성종실록』 성종 22년(1491년) 5월 5일

존엄한 곳에 음식을 올리는 것을 궤(饋)라고 한다.

- 『경국대전주해』 공궤

궁중음식은 크게 일상식과 의례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왕족의 생일이나 경사에 제공된 연회식, 외국 사신 접대를 위한 영접식, 왕실의 혼례에 쓰인 가례식, 왕실 제사 때 올린 제례식 등 다양한 의례식이 있었는데요.

『진연의궤』, 『진찬의궤』 등 의례식에 대한 기록은 많은 편이나 왕실의 일상식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 편입니다. 현재 왕실의 일상식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는 무형문화재 지정을 통해 전수되어 온 고종대의 상차림과 정조 19년의 기록 『원행을묘정리의궤』가 있는데요. 이는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가서 진찬을 베풀고 다시 환궁할 때까지 8일간의 상차림에 대한 기록으로, 왕실 연회식과 함께 일상식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찬의 높낮이 배치에 관한 자(尺)와 양(量)은 각 참에 보내어 식대로 거행하게 한다.

- 『원행을묘정리의궤』 권사, 찬품

돌아오실 때의 주수라에는 어만두로 한다.

- 『원행을묘정리의궤』 권사, 찬품, 을묘 윤 2월 9일 조수라

본궁에서의 일상식 차림새와 같은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행행 중 일상식의 식사 횟수나 음식내용, 계절 식재료, 상차림의 구성 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궁중에서의 평상시 일상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국법에는 내선부(內膳夫)가 하루 다섯 번 왕의 찬선(饌膳)을 바치게 되어

- 『영조실록』 127권, 영조 대왕 행장(行狀)

‘수라’로 표현되는 왕의 식사는 하루 삼시세끼가 아니라 다섯 번의 식사, 오시오끼로 진행됐다고 합니다. 아침 7시경 보약이나 죽, 미음 등의 유동식을 올린 초조반, 10시경 아침 식사인 조수라, 12시나 1시경 유동식이나 다과로 차린 낮것상, 저녁 5시경 저녁 식사인 석수라, 그리고 야참으로는 면, 약식 또는 우유죽 등을 올렸다고 하는데요.

아침, 저녁으로 올렸던 수라상은 정해진 예법과 갖은 정성으로 차려졌습니다. 두 가지씩의 수라와 탕, 그리고 김치, 장류 등의 기본 음식과 12첩의 음식들로 구성되었는데요. 백반과 팥 삶은 물로 지은 찹쌀밥인 홍반을 수라기에 담고, 탕을 준비해 탕기에 담아 올려 골라 드시도록 준비했습니다. 또 더운 찬과 식은 찬을 함께 해 음양오행의 조화를 담았고, 12가지 음식들도 다양한 재료로 조리법을 각기 달리해서 정성껏 만들었다 하네요.

이렇게 만들어진 찬품들은 모두 은 반상기에 담아 큰 원반과 곁반인 작은 원반과 책상반, 총 3개 상에 나눠 차렸으며 임금의 식사 전 상궁이 먼저 기미를 하고 식사 과정을 세심히 돕는 등의 예법도 중요했다고 합니다.

존엄한 왕의 밥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음식 하나에도 예와 정성을 담아 산해진미로 차려냈던 수라상
얼핏 보면 왕이 항상 맛있게 잘 먹기 위해 차려진 식탁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궁중음식은 ‘약식동원’과 ‘식치’의 철학을 기본으로 음식을 통해 왕의 건강을 미리 살펴 임금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했고또 백성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통치의 또 다른 수단이기도 했는데요.

궁중음식의 재료는 모두 지방의 농수산물을 궁중에 바치는 제도인, ‘진상’을 통해 조달되었습니다. 각 지역의 다양하고 진귀한 특산물이 궁중으로 진상되어 왕의 식탁에 올랐는데요. 왕은 수라상에 진상되어 올라온 식자재의 상태를 보고 지방의 상황을 두루 짐작하고 살폈습니다.

나라가 가뭄이나 홍수 등의 재난에 처해 있을 때는 수라상 음식의 가지 수를 줄이는 ‘감선’을 행하고 진상을 멈추도록 했다 하네요.

올해는 치우치게 가뭄이 심하여 영남의 가을 곡식이 여물기 전에는 매달 초하루에 진상하는 것을 멈추어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 『영조실록』 영조 47년(1771년) 8월 5일

금년은 비가 자주 내리지 않았으니 송이를 찾아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전에 이미 진상한 것 이외에는 진상하지 말아 백성에게 폐해가 없도록 하라.

- 『정조실록』 정조 21년(1797년) 7월 29일

고기를 금하고, 채소 음식을 먹으며 스스로 절제와 검소를 실천하는 왕의 밥상에서 애타는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임금으로서 자책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중요한 왕의 밥상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궁중음식은 수라간 또는 소주방이라 불린 궁중의 주방에서 조리 경험이 풍부한 ‘상궁’과 진연 음식을 맡아 했던 남자조리사 ‘숙수’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궁중음식의 조리 방법과 기물, 반배법 등은 실록, 의궤 등 다양한 기록과 함께조선의 마지막 주방상궁인 한희순 상궁에 의한 기능 전수를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요. 197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 문화 보존을 목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 전수되어 오고 있습니다.

“음식 문화를 통해서 우리들은 그 나라의 역사, 관습, 그리고 전통 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궁중음식은) 음식 문화의 정수이자 하나의 전통문화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꼭 이어나가야 될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라나 교수 / 경희대학교 관광대학원 조리외식경영학과

철저한 철학과 예법의 기준 하에 갖은 정성으로 차려졌던 궁중음식, 밥상 하나에도 백성과 나라를 살피고자 했던 왕조의 역사를 잘 느낄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궁중음식은 일상식, 의례식으로 나뉜다.
2. 왕의 식사는 수라로 칭하며, 하루 5번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3. 왕은 전국에서 진상해온 식자재를 보고 백성의 삶을 살폈고, 나라에 근심이 생기면 감선을 행해 절제와 검소를 실천했다.

해설

우리나라는 5,000년의 역사를 이어 오면서 조선 왕조에 이르러 가장 화려한 음식 문화를 이루었다. 궁중음식이 한국 음식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각 고을에서 들어오는 진상품을 가지고 조리 기술이 뛰어난 주방상궁과 대령숙수들의 손에 의해 잘 다듬어져서 전승되어왔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궁중의 식생활에 관하여는 『경국대전』, 『조선왕조실록』, 『진연의궤』, 『진작의궤』, 『궁중음식발기』 등의 문헌에 잘 나타나 있다. 의례, 기명(器皿), 조리 기구, 상차림법, 음식명과 음식의 재료 등을 알 수 있다. 궁중 음식의 조리 기술은 나인들의 손에서 손으로 대를 이어 전승되어 온 것으로, 이를 바로 알고 보존하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궁중음식 조리기능 및 음식문화를 전승하기 위하여 1971년 1월 6일 ‘조선왕조궁중음식’을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1대 한희순 상궁, 2대 황혜성, 3대 한복려(궁중음식)와 정길자(궁중병과)를 보유자로 인정되어 맥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왕조 궁중음식의 일상식

수라(水刺)는 고려 때 몽골의 영향으로 생긴 용어로 왕과 왕비께 올리는 진지를 말한다. 궁중에서의 평상시 일상식은 이른 아침의 초조반(初朝飯), 조반(朝飯)·석반(夕飯)의 두 번의 수라상(水剌床) 그리고 점심 때 차리는 낮것상과 밤중에 내는 야참까지 다섯 번의 식사를 올린다.

궁중의 일상식에 대한 문헌은 연회식에 관한 것보다 훨씬 부족한 형편이다. 그중 유일하게 궁중 일상식을 알 수 있는 문헌으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가 남아 있다. 정조 19년(1795)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의 현륭원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푼 기록으로 이 의궤에는 경복궁을 출발하여 화성에 가서 진찬(進饌)을 베풀고 다시 환궁할 때까지 8일간 대접한 식단이 자세히 실려 있어 구한말보다 약 1세기 앞선 18세기 후반의 수라상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궁중의 일상식은 왕의 사고방식에 따라서 사치스럽게 산해진미를 즐기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검소하게 차린 경우도 있다. 『영조실록』에는 “대궐에서 왕족의 식사는 예부터 하루에 다섯 번이다”고 하였으나 영조는 검박하여 오식(午食)과 야식(夜食)을 두번 줄여서 하루 3회로 하였다고 한다. 임금에 따라서 수라상의 규모가 다르나 한말의 수라상 차림은 다음과 같다.

- 초조반(初朝飯)
아침 수라를 열 시경에 차리므로 보약을 먹지 않는 날에는 유동식으로 보양이 되는 죽, 응이, 미음 등을 이른 아침에 올린다. 아침 일찍 먹는 조반이므로 초조반 또는 자릿조반이라고 한다. 찬품이 간단하여 죽상을 차릴 때는 죽, 미음, 응이 등을 합에 담고 어포, 육포, 암치보푸라기, 북어보푸라기, 자반 등의 마른찬을 두세 가지 차리고 소금, 꿀, 재래식 간장인 청장 등을 종지에 담는다. 김치는 나박김치나 동치미가 올려 졌고 조치는 소금이나 새우젓국으로 간을 맞춘 찌개인 맑은 조치가 쓰였다.

- 수라상
아침 수라는 열시 경에, 저녁 수라는 저녁 다섯 시경에 차렸다. 평상시에는 수라간(水剌間)에서 주방 상궁들이 준비한 수라상을 왕과 왕비가 각각 동온돌과 서온돌에서 받으며 겸상을 하지 않는다. 평소의 수라상은 12첩 반상 차림으로 수라와 탕 두 가지씩과 기본 찬품, 뚜껑이 덮인 납작한 그릇인 쟁첩에 담는 열두 가지 찬물로 구성된다. 기본 음식으로 백반(白飯)과 팥 삶은 물로 지은 찹쌀밥인 붉은 빛의 홍반(紅飯) 두 가지를 담고, 탕은 미역국과 곰탕 두 가지를 올려 좋아하는 것을 골라 먹도록 준비한다. 조치는 토장조치와 젓국조치 두 가지를 준비하고 찜, 전골, 김치 세 가지가 기본 음식이다. 상 위에 놓는 조미품으로 청장, 초장, 초고추장, 겨자즙 등을 종지에 담는다.

- 낮것상
점심은 ‘낮것’이라 하여 평소에는 마음에 점을 찍을 정도로 가벼운 음식인 응이, 미음, 죽 등의 유동식이나 간단한 다과상을 차려서 올린다. 왕가의 친척이나 손님이 점심 무렵에 방문했을 때에는 국수장국이나 다과상을 차려서 대접한다.

조선왕조 궁중음식관련 공간과 조리인

- 궁중음식과 관련된 공간
궁중에는 왕과 왕족들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곳을 소주방(수라간)이라 하며 각 전각에 안소주방과 밖소주방으로 나뉘어 딸려 있었다. 안소주방에서는 일상적인 음식을, 외소주방에서는 백일, 돌, 생일, 혼인, 제사와 관련된 음식을 만들었다. 궁중에서 여러 가지 명목의 큰 의례행사들이 수시로 진행되어 숙설소라는 큰 가건물을 따로 짓고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렸다.

- 주방상궁
소주방 나인은 다른 궁녀들과 마찬가지로 13세경에 입궁하여 궐 안에서 윗 상궁을 스승처럼 모시며 여러 가지를 견습하게 된다. 관례는 입궁 후 15년이 지나서 치르는 것이 원칙으로 일종의 성년식이며 결혼식이나 다름없다. 관례 후 정식 내인이 되며 다시 15년을 경과하여야 상궁의 봉첩을 받는다. 주방 상궁은 대개 40세가 지나서 되는데 이미 이때는 조리 경험이 30년 이상이 되는 전문 조리인이다.

- 대령숙수(待令熟手)
조선시대 후기 궁중에서는 평상시의 수라상에 올리는 음식은 주방 상궁들이 만들었으며, 궁중의 잔치인 진연·진찬 때는 대령숙수라고 하는 남자조리사들이 만들었다. 솜씨가 좋은 숙수들은 대부분 대를 이어가며 궁에 머물렀고 왕의 총애도 받았다.

궁중음식에 담긴 사상

- 의식동원
의식동원(醫食同源)이란 의약과 음식의 근원이 같다는 뜻으로 약식동원(藥食同源)과 같은 의미이다. 즉 질병 치료와 식사는 인간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양념은 ‘약이 되도록 염두에 두다’라라는 의미로 ‘갖은 양념’이라 한다. 세조는 의약론(醫藥論)을 지어 의사를 8종류로 나누고 그 중 병자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심의(心醫)와 음식을 처방하여 몸을 돌보게 하는 식의(食醫)를 바람직한 의원으로 꼽으며 질병의 치료에 앞서 예방을 강조하였다.

- 감선(減膳)
감선은 나라에 한재나 수재, 가뭄이 들거나 상중, 제사일 경우 왕은 자신의 부덕함을 자책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위로하기 위해 음식 수를 줄이는 것을 뜻한다. 감선은 자연재해 외에도 왕의 친척이나 신하, 그의 친척이 아프거나 죽는 등 애도의 뜻으로 감선을 행해 졌으며 왕의 요구가 신하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감선을 행했다. 가뭄이나 홍수로 감선을 할 때는 물품을 진상하는 일도 멈추도록 명령을 내렸고 감선의 이유가 해결되면 보통 때의 식사로 되돌리는 복선(復膳)을 명령하고 감선을 멈추었다. 이처럼 왕의 식사는 사적이수만은 없었으며 전국의 귀한 농수산물이 진상되어 차려진 수라상을 통해 나라 곳곳의 상황을 두루 살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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