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론
제목 | 소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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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少論 |
유형 | |
시대 | 조선 시대 |
관련국가 | 조선 |
유의어 | |
별칭•이칭 |
[정의]
조선 후기 붕당 정치의 심화에 따라 서인(西人)에서 분파된 정파(政派).
[내용]
조선 시대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사림(士林)이 정권을 잡은 후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대 초반 동인과 서인의 붕당이 형성되었고, 이 중 서인에서 노론과 소론이 분파(分派)되었다.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의 환국 정치 속에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숙종 즉위 초에는 예송 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에 따라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인이면서 남인의 동태를 감시하고, 역모를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은 김석주, 김익훈 등의 척신(戚臣)에 대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사직을 지켜낸 공로가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연소한 서인 관료들은 송시열 등 노장파가 훈척(勳戚)에 영합한 것이라며 생각하였다. 주자학적 질서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노론과는 달리 소론은 목적을 위해 부정한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남인에 대해 좀 더 온건한 입장이었다. 여기에 송시열의 제자인 윤증(尹拯, 1629~1714)이 송시열과 대립하면서 서인 내부의 분열은 더욱 격화되었다. 결국 율곡 이이(李珥)를 종장으로 한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우계 성혼(成渾)을 종장으로 한 윤증 중심의 소론으로 분파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숙종 사후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이 즉위한 이후 격화되었다. 죄인으로 죽은 장희빈의 소생이지만 세자로서의 지위를 가진 경종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의 소론과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이후 영조)을 지지한 노론은 경종 재위 연간에 충돌하였다. 노론이 연잉군의 세제(世弟) 책봉에 이어 대리청정을 추진하자 소론은 이를 역적으로 규정하여 노론을 일거에 몰아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충신과 역적을 가르는 논의로 격화되었던 것이다. 소론이 정권을 잡았지만 경종이 4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였고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러자 일부 과격한 소론이 재야 남인과 결탁하여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으로 소론을 기용하여 소론이 정권에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다.
소론에는 주자학의 교의에 충실한 노론 학자들과 달리 새로운 경전 해석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취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일부 소론 가문에서는 강화도를 중심으로 양명학을 받아들여 강화학파를 형성하였으며, 실천적인 유학을 고민하였다.
▶ 관련자료
- ㆍ소론(少論)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동⋅서 붕당의 발생
-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해설: 붕당 정치에 대한 비판
- 주제로 보는 한국사: 1) 관료가 되는 길
- 한국의 역사: 나. 한 붕당이 권력을 독점하다(B. One Single Faction Monopolizes Power)
- 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사: 붕당 정치의 변질
-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붕당 정치의 변질과 탕평론의 대두